[Part 1] 마릴린 맨슨은 진짜 사탄숭배자였을까? 😈
마릴린 맨슨의 음악적 여정과 논란 정리•요약
음악적 배경
종교적 배경과 반감을 통해 그의 예술적 철학 형성
기자에서 뮤지션으로의 전환: 저널리즘 전공 후, 트렌트 레즈너와의 만남을 통해 음악적 전환점 맞이
1990년 밴드 결성과 도발적 이름의 탄생, 초기 인기도
본격적인 음악 활동의 시작
나띵 레코드와의 계약, 앨범 작업: 《Portrait of an American Family》 발매 후, 상업적 성공 미비
EP 《Smells Like Children》을 통해 중요한 전환점 맞이
사탄주의자 이미지 논란
사탄교 창시자와의 만남과 그로 인한 논란
실제로는 니체의 무신론적 사상과 기독교에 대한 풍자
극단적 창작과 명반
《Antichrist Superstar》는 과격한 퍼포먼스와 논란을 일으킨 앨범
기독교 우파와 정치에 대한 강한 비판 포함
[Part 2] 마릴린 맨슨은 진짜 사탄숭배자였을까? 😈로 이어집니다.
마릴린 맨슨, 논란의 중심에 선 뮤지션
마릴린 맨슨은 그의 음악, 비주얼, 행동을 통해 끊임없이 논란을 일으킨 뮤지션입니다.
그 누구보다 악마 같은 이미지로 알려진 맨슨의 아버지는 의외로 카톨릭 신자였고, 어머니는 성공한 개신교 신자였습니다. 또한 그는 1학년부터 10학년까지 미션 스쿨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슨은 그곳에서 종교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독단적으로 자신들만의 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모습을 보며, 맨슨은 기독교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열네 살 때는, 인기 있는 신앙 치료사가 사람들을 세뇌시키고 방언을 하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이 경험은 그가 록 뮤지션의 길을 선택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이후, 그는 신에 대한 다른 해석을 찾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인간 본성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맨슨은 흔히 말하는 ‘7가지 대죄’를 인간 본성의 일부로 보고, 죄책감이나 회개, 지옥에 대한 걱정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결국 그는 세상을 지옥으로 여기며, 음악과 예술만이 유일하게 영적인 것이라고 믿고, 이를 자신의 예술적 표현으로 선택했습니다.
기자에서 뮤지션으로의 전환
1989년, 대학생이 된 마릴린 맨슨은 저널리즘을 전공하며 기자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기자로 일하면서 여러 뮤지션을 만났고, 그는 극적인 일들이 펼쳐지는 음악계에서 경험을 쌓으며 점차 자신의 길을 찾게 되었죠.
그가 만난 뮤지션들 중, 특히 트렌트 레즈너(Trent Reznor)와의 인터뷰는 그의 음악 경력에 중요한 전환점을 가져왔습니다. 이 만남은 훗날 맨슨의 음악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는 이 시기에 마릴린 맨슨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었죠.
그가 만난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은 밴드 초창기 기타리스트인 스콧 푸테스키(Scott Putesky)였으며, 스콧은 맨슨의 가사와 시에서 그가 가진 독특한 재능을 발견하고 함께 밴드를 결성할 것을 제안했다고 합니다.
밴드 결성과 독특한 밴드 네이밍
1990년, 맨슨은 스캇과 함께 새로운 밴드를 결성합니다. 밴드 이름은 마릴린 맨슨 앤더 스푸키 키즈(Marilyn Manson and the Spooky Kids)로, 이름부터가 굉장히 도발적이었죠.
'마릴린 맨슨'이라는 이름은 섹스 심볼인 배우 마릴린 먼로와 사이비 종교 교주 찰리 맨슨의 이름을 결합한 것으로, 선과 악의 이분법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었습니다.
이 독특한 이름과 컨셉 덕분에 밴드는 결성된 지 6개월 만에 플로리다에서 큰 인기를 끌며, 300석 규모의 공연을 매진시키는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그들의 공연은 기괴한 의상과 파격적인 퍼포먼스, 심지어 알몸의 여성을 십자가에 박는 장면, 동물 피를 뿌리는 등의 충격적인 요소로 화제를 모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음악 스타일과 쇼는 1991년 초, 소니 뮤직과의 계약을 성사시키지는 못했습니다. ANR 담당자는 밴드의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쇼는 좋게 평가했지만, 맨슨의 이미지에는 거부감을 느껴 계약을 거절했다고 하죠.
트렌트 레즈너와 마릴린 맨슨의 운명적 만남
1993년 여름, 마릴린 맨슨과 그의 밴드 마릴린 맨슨 앤더 스푸키 키즈는 인더스트리얼 메탈의 거장 트렌트 레즈너의 눈에 띕니다. 당시 나인 인치 네일스(Nine Inch Nails)의 프론트맨이던 레즈너는 데뷔작 《Pretty Hate Machine》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소속사 TVT 레코드의 간섭 속에서 창작의 제약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신분을 감추고 가명을 사용해 활동을 이어가다, 결국 메이저 레이블 인터스코프 레코드와의 계약을 통해 창작의 자유를 되찾게 됩니다. 이 계약 조건 중 하나는 그가 자신의 레이블을 직접 설립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나띵 레코드입니다.
이후 나띵 레코드를 통해 NIN의 두 번째 앨범 《The Downward Spiral》이 발매되며 엄청난 찬사를 받았고, 투어를 준비하던 레즈너는 마릴린 맨슨과 그의 밴드를 오프닝 밴드로 기용합니다. 동시에 이들과 나띵 레코드의 첫 아티스트 계약을 체결하게 되죠.
이 만남은 마릴린 맨슨의 커리어에 전환점을 마련했을 뿐 아니라, 인더스트리얼 메탈의 대중화를 이끄는 중대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인더스트리얼 메탈의 기원과 발전
인더스트리얼 메탈의 뿌리는 1970년대 초중반의 실험적이고 아방가르드한 사운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킬링 조크, 스완스, 빅 블랙 등의 밴드들이 록 사운드를 결합하며 점차 대중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죠. 80년대 후반에는 플래시 미니스트리, KMFDM 등이 왜곡된 기계음과 신디사이저, 헤비메탈 사운드를 혼합해 인더스트리얼 메탈의 기틀을 확립했습니다.
90년대에 들어 트렌트 레즈너의 나인 인치 네일스가 이 장르를 대중적으로 이끌었으며, 마릴린 맨슨, 롭 좀비, 필터, 람슈타인 등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인더스트리얼 메탈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특히 마릴린 맨슨은 글램록과 고스록, 도발적인 퍼포먼스를 결합한 독창적인 사운드와 비주얼로 이 장르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습니다.
나띵 레코드와의 계약, 마릴린 맨슨의 첫걸음
마릴린 맨슨은 나띵 레코드와 계약을 맺은 후, 밴드명을 ‘마릴린 맨슨’으로 간단하게 바꾸고 데뷔 앨범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초기에는 더 뉴 오더, 셀틱 프로스트와 함께 작업했던 로리 모시만(Roli Mosimann)이 프로듀싱을 맡아 《The Manson Family Album》이라는 이름으로 앨범을 완성했죠. 하지만 맨슨과 트렌트 레즈너는 사운드가 너무 깔끔하고 세련됐다는 이유로 불만을 표했고, 결국 기존 녹음본을 모두 폐기하고 다시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데뷔 앨범의 녹음 장소도 꽤 화제가 되었는데, 바로 1969년 찰스 맨슨 패밀리가 악명 높은 살인을 저질렀던 집이었어요. 이곳을 트렌트 레즈너가 스튜디오로 개조한 거였죠. 물론 이로 인해 논란이 일었지만, 레즈너는 단지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고 해명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밴드의 베이시스트였던 지제 게이는 헤로인 중독 문제로 해고되었고, 그 자리를 맨슨의 오랜 친구이자 밴드에 적극적으로 합류하려 했던 트위기 라미레즈가 대신하게 됐습니다. 트위기는 사실 베이스 경험이 전혀 없었지만, 그 이후 밴드 사운드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데뷔 앨범 《Portrait of an American Family》을 향한 혹평
마릴린 맨슨의 데뷔 앨범 《Portrait of an American Family》는 이렇게 탄생해서 1994년에 발매되었습니다. 하지만 맨슨 자신도 인정했듯이, 완성도 면에서는 부족한 부분이 있었고, 상업적 성과나 평단의 반응도 그다지 좋지 않았죠. 맨슨은 레이블인 인터스코프 레코드가 제대로 홍보를 하지 않았다는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데뷔 앨범의 실패 이후, 1995년에 발매된 EP 《Smells Like Children》은 마릴린 맨슨의 커리어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기존 곡들의 리믹스와 커버곡들로 구성된 이 앨범에서, 특히 유리스믹스의 커버곡 〈Sweet Dreams〉의 뮤직비디오는 MTV에서 자주 방영되며 큰 주목을 받았어요. 이 곡은 마릴린 맨슨의 첫 메이저 히트곡으로 자리 잡으면서, 이후 그의 음악적 행보에 큰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미지 논란: 사탄주의자?
한편, 마릴린 맨슨은 한때 사탄교의 창시자로 알려진 안톤 라비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밴드 이름부터 사악한 이미지를 풍기던 상황에서 안톤 라비에게 사탄교의 명예 사제 칭호를 받으면서, 대중의 오해는 더욱 커졌죠.
하지만 맨슨은 이 만남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단순한 관심에 불과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그의 외형과 퍼포먼스만 보면 사탄주의를 신봉할 법한 인상이지만, 실제로 그의 철학적 기반은 사탄교가 아니라 프리드리히 니체의 무신론적 사상에 가까웠습니다. 맨슨은 악마의 존재조차 부정하며, 사타니즘은 기독교의 억압에 저항하고 인간 본연의 본능을 되찾기 위한 철학적 저항이라고 주장했죠.
하지만 그의 파격적인 이미지와 과장된 퍼포먼스 덕에 여전히 그는 사탄주의자로 오해받아왔습니다. 맨슨은 꾸준히 사타니스트라는 의혹을 부정하며, 자극적인 비주얼과 퍼포먼스를 통해 기독교적 가치관을 풍자하고 도전한 것일 뿐, 실제로 악마를 숭배하거나 사탄교를 신봉한 적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최근에는 그가 크리스천으로 회심했다는 루머도 돌고 있지만, 그 부분은 아직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극단의 작업과 명반의 탄생
마릴린 맨슨은 두 번째 앨범 작업을 준비하면서 극단적인 환경 속에서 창작을 강행했습니다. 잠을 자지 않고, 약물을 사용하며, 심지어 자해까지 하면서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은 거죠.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밴드 멤버들 간의 갈등도 심화되었고, 결국 창립 멤버이자 기타리스트였던 데이지 버코위츠는 녹음 도중 밴드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프로듀서였던 트렌트 레즈너와의 관계도 악화되었습니다. 녹음 과정 중의 극한 분위기와 갈등으로 인해 두 사람은 결국 이후 함께 작업하지 않기로 했죠.
✝️ 《Antichrist Superstar》
이런 처절한 과정을 거쳐 완성된 앨범이 바로 마릴린 맨슨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Antichrist Superstar》였습니다.
《Antichrist Superstar》는 제목부터 강한 반기독교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뮤지컬 <Jesus Christ Superstar>를 패러디하며, 한 편의 록 오페라 형식으로 제작되었죠. 이 앨범은 기독교 우파와 보수적 정치권을 비판하는 상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앨범은 세 개의 파트로 나뉘어, 니체 철학에 영향을 받은 초자연적 존재가 인간의 본능과 분노를 선동하며 권력을 빼앗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공연 역시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성경을 찢고, 미국 국기를 모욕하는 등 과격한 퍼포먼스를 이어갔죠. 이 장면들이 왜곡되어 ‘공연 도중 사탄 숭배와 동물 학대를 했다’, ‘마약을 나눠줬다’는 등의 가짜 뉴스가 퍼지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보수적인 종교 단체들의 반발과 공연 금지 청원까지 이어졌지만, 앨범은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며 반체제 문화의 상징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Part 2] 마릴린 맨슨은 진짜 사탄숭배자였을까? 😈로 이어집니다.
Created by 뮤직메카 @musicmeccatv
교정 by SENTNECIFY / 편집자 이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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