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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한국의 로스트미디어, 원본마저 행방불명 된 춘사 나운규의 명작, 영화 《아리랑》

목차 📚

📌 먼치 POINT

1. 영화 《아리랑》의 제작과 상징성

  • 1926년 개봉한 《아리랑》은 춘사 나운규가 각본, 감독, 주연까지 맡은 독립 영화이다.

  • 항일 의식과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 15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 변사 성동호가 임검석이 비어있던 날 3·1운동 설정을 즉흥 해설한 일화로 인해 항일 영화로 자리매김했다.

2. 영화와 민요의 탄생 및 문화적 영향

  • 영화의 주제곡으로 삽입된 <아리랑>은 기존 민요가 아닌 나운규가 기억을 바탕으로 만든 창작곡이었다.

  • 후속편도 제작되었으나 1편의 작품성과 흥행을 넘지 못했고, 나운규의 연기력만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 《아리랑》은 이후 한국 영화사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는 상징적 작품으로 기억된다.

3. 소실된 영화와 복원을 위한 노력

  • 6·25 전쟁 중 필름이 유실되어 현재는 사진 몇 장만 남아 있는 상태다.

  • 1980년대 일본 수집가 아베 요시노부가 원본 필름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 현재까지도 원본 필름은 미발견 상태로, 복원을 위한 국내외 탐색이 이어지고 있다.


들어가며

현대인들의 취미로 가장 많이 선택받는 것 중 하나가 영화 시청이다. 특히 영화는 그 역사가 오래된만큼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진 작품들도 존재한다. 숨겨진 고전 영화, 그것도 아주 오래된 작품을 재발굴하여 시청하는 사람들도 많다. 한국에도 이런 고전 영화들이 존재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고전 영화 중에는 전설로 남아버린 작품이 하나 있다. 영화 자체의 작품성 때문에도 전설로 불리지만, 이제는 볼 수가 없게 되어 버려서 전설 속의 영화로 불리기도 한다.


1926년, 전설적인 영화 《아리랑》의 탄생

아직 일제강점기였던 1926년 한 영화가 개봉되었다. 이 영화의 제목은 《아리랑》으로, 조선키네마 프로덕션에서 제작을 맡았으며 개봉은 단성사 극장에서 진행되었다. 이 영화는 크게 인기를 끌어 2년 넘게 상영되었고, 그 당시 무려 15만 명의 관객수를 기록했다. 엑스트라만 800여 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이 영화의 제작을 맡은 것은 바로 춘사 나운규였다. 제작만이 아닌 각본, 감독, 주연까지 맡아서 사실상 영화 전체를 총괄하고 만들어냈다. 춘사 나운규는 1902년 함경도에서 태어났으며, 영화배우뿐만이 아닌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안타깝게도 1937년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영화 속에 담긴 항일정신과 시대상

주인공 영진의 비극적 운명

영화 《아리랑》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나운규가 맡은 영화의 주인공 영진은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정신이 나가버린 청년이다. 그에게는 여동생 영희가 있었는데, 영진의 친구였던 현구는 그의 여동생 영희를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지게 된다. 마을에는 오기호라는 인물이 영진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그는 마을 땅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심성이 대단히 좋지 못한 악덕 지주였다. 모자라 일본 경찰의 앞잡이를 하는 자였다.

어느 날 오기호는 주인공 영진의 집에 찾아가 빚을 갚든지 아니면 영희를 내놓으라는 협박을 한다. 그것도 모자라 영희를 강제로 겁탈하려는 장면을 영진의 친구였던 현구가 목격하게 된다. 현구는 영희를 구하기 위해 오기호와 싸움을 벌이게 되고, 결국 오기호가 도끼를 들어 현구에게 내리치려 한다. 그때 이 모습을 본 영진이 환상을 보며 혼란스러워하다가 자신이 들고 있던 낫을 오기호의 가슴팍에 휘두른다. 오기호는 그 자리에서 숨지게 되고, "나는 이 땅 삼천리에 태어나 미쳐버렸다"라는 마지막 대사와 함께 영진은 순사들에게 붙잡혀 가게 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변사 성동호의 즉흥적 각색

춘사 나운규가 독립운동가이기도 했기 때문에 영화 《아리랑》 역시 그의 이런 항일정신이 스며들어 있다. 특히 주인공 영진이 정신이 나가버린 이유 역시 3·1운동에 참여하다가 일본 순사에게 체포되고 고문을 받은 후유증으로 인해 미쳐버렸다는 설정이다. 그런데 원래 설정은 영진이 그냥 학교에 다니고 있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퇴학을 당하게 되고, 그래서 정신이 나가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극장가에는 임검석이라는 좌석이 존재했다. 이 임검석이라는 좌석에는 종로경찰서 보안계에서 파견된 일본 순사들이 앉아 영화나 공연을 감시하는 역할을 했다. 한마디로 사상적, 정치적인 검열을 하는 조치였다. 이에 따라 무성영화의 장면을 해설하고 설명하는 변사는 문제가 될 수도 있는 해설을 자제해야만 했다. 당시 단성사의 인기 변사였던 성동호는 《아리랑》이 상영되는 어느 날 임검석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영진이 3·1운동에 참여했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미쳐버렸다는 설정을 즉흥적으로 집어넣어 영화를 해설했다고 전해진다. 오히려 이런 설명이 훨씬 관객들에게 와닿았기 때문에 영진의 이런 설정이 암암리에 굳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민요 <아리랑>의 탄생과 후속작들

영화를 위해 새롭게 만들어진 주제곡

특이하게도 이 영화는 개봉 당시에는 춘사 나운규 본인의 이름을 걸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 영화를 개봉했다고 한다. 표면적으로는 일본인 스모리 슈이치라는 사람의 이름을 댔고, 대신 각본에는 '춘사'라는 자신의 호를 그리고 주연으로는 본명 '나운규'를 넣어 개봉했다. 이 때문에 일본 감독이 만든 것이란 얘기가 나오기도 했지만, 1936년에 발간되었던 '조선영화'라는 잡지에서 나운규가 《아리랑》을 직접 제작 및 연출했다고 언급했기에 이 부분에 대한 의혹은 일단 가라앉았다.

영화 《아리랑》에 우리가 잘 아는 민요 <아리랑>이 주제곡으로 들어가 있다. "심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는 가사로 널리 알려져 있는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잘 아는 그 노래다. 그런데 이 노래가 완전히 오래된 전통 민요는 아니고 영화 '아리랑'을 위해 직접 제작된 노래였다고 한다. 1937년 '삼천리'라는 잡지가 나운규와 나눈 인터뷰에서 나운규 본인은 어린 시절 철도 노동자들이 부르던 구슬픈 노동요를 우연히 들었던 적이 있었고, 그 멜로디를 생각해내어 그가 가사를 붙인 다음 단성사 음악대 김영환 씨에게 의뢰하여 작곡 및 편곡을 맡아 탄생한 것이라고 밝혔다.

시리즈의 성과와 나운규의 연기력

그렇게 누적 관객 15만 명을 기록하며 당대로서는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세운 영화 《아리랑》은 그 인기에 힘입어 시리즈가 3편까지 나오게 되었다. 후속편들은 그다지 평가가 좋지 못했다고 한다. 1930년 개봉한 《아리랑 후편》은 나름 좋은 평가였지만, 1936년에 유성영화로 제작된 마지막 《아리랑 3편》은 평가가 무척 좋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주연을 맡았던 나운규의 연기력은 대단했다. 춘사 나운규의 광기에 찬 눈빛 연기와 표정에서 미쳐버린 주인공 영진과 한몸이 된듯한, 그야말로 광인의 연기를 신들린 듯이 선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소실된 명작과 복원을 위한 노력들

6·25 전쟁으로 인한 필름 소실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영화 《아리랑》은 언제부터인가 완전히 찾아볼 수 없는 작품이 되었다. 1편뿐만이 아닌 후속편인 3편까지 시리즈 전체가 유실되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원인은 바로 1950년에 벌어진 6·25 전쟁 이후 나라 전체가 큰 혼란을 겪게 되면서 이 와중에 필름 자체가 사라져버린 것이라고 한다.

앞서 말했듯이 단성사에서 개봉되어 2년간 상영되고 또 국내뿐만이 아닌 일본에도 소개가 되었다. 특히 조선인이 강제 징용되어 있었다고 하는 홋카이도 광산에서 상영이 되었다고 한다. 광복 이후에는 6·25 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 간간이 서울에서 상영이 되었다고 하며, 마지막 상영 기록은 1952년 대구의 만경관에서 약 일주일간 상영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일본인 수집가 아베 요시노부와의 실랑이

그런데 이 《아리랑》을 다시 찾을지도 모르는 기회가 1980년대 초반에 찾아오게 되었다. 당시 일본 방송국의 다큐멘터리 제작진이 방송 촬영차 한국을 방문하며 밝힌 사실에 따르면, 이 《아리랑》의 원본 필름을 소유 중일 수도 있는 사람이 일본에 거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오사카에 거주 중이던 아베 요시노부라는 남성이었다. 그의 자택에는 수많은 과거 영화 필름들이 쌓여 있었는데, 이른바 영화 수집광이었다고 전해진다.

처음 그에게 접촉한 것은 다름 아닌 북한이었다. 요시노부는 북한의 요청을 거절했으며, 1980년대에는 대한민국의 여러 영화 관계자들이 그를 찾아가 필름의 반환을 요청했지만 이 또한 거절했다. 특히 당시 요시노부계를 찾아갔던 관계자들 중에는 춘사 나운규의 실제 아들이었던 나봉한 감독도 있었다. 아버지의 영화를 다시 되찾을 기회를 얻길 바랐지만, 그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반환을 거절했다. 심지어 한국 정부에서 정식으로 요청하면 주겠다거나 한반도가 통일을 이루면 돌려주겠다는 발언을 해서 많은 사람들이 분노를 하기도 했다.

여전히 미궁 속인 원본 필름의 행방

2005년 아베 요시노부는 상속인 없이 사망하게 되었고, 그가 보유하고 있던 영화 필름들은 모두 일본의 문화청에 귀속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그의 소장품 중 있던 필름의 목록을 조사한 결과 실제로는 《아리랑》을 가지고 있지 않던 것이 밝혀졌다. 요시노부는 생전에 일본의 여러 지역을 언급하며 그곳들에 필름이 보관 중일 수도 있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어쩌면 일본의 다른 지역에 존재할 수도 있다.

의외로 미국에 있을 수도 있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2016년 근현대 골동품 수집을 전문으로 하고 있는 이모 씨가 어느 언론지와 했던 인터뷰에 따르면, 이 《아리랑》은 1920년대 당시 일본에도 수출되었고 일부 필름이 대만 등에 흘러 들어가기도 했다는데, 이렇게 해외의 필름이 여러 방향으로 나눠지면서 일부가 미국 등지에도 넘어갔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나가며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두가 좋아했다던 영화 《아리랑》. 수많은 기록들도 남아 있고 리메이크도 되었지만, 정작 현대에 남아 전해지는 것은 영화의 일부 장면이 담긴 몇 장의 사진들뿐이다. 언젠가는 꼭 원본 필름을 되찾아서 다시 한번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오게 되기를 바란다.

Created by 미스터리큐브
CC BY 라이선스 | 교정 SENTENCIFY | 에디터 이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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