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훈, 그는 누구인가
📌 먼치 POINT
피아니스트로 시작된 음악 인생
5세에 피아노를 시작해 7세에 서울시향과 협연하며 신동으로 주목받았다. 미국 이주 후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음악에 매진했고, 차이콥스키 콩쿠르 2위를 계기로 세계 무대에 이름을 알렸다.지휘자로의 전환과 세계적 명성
줄리어드 졸업 후 LA 필에서 지휘 수련을 시작, 뉴욕·빈·런던 필을 거치며 세계 무대에서 입지를 다졌다. 바스티유 오페라 음악감독으로 프랑스 음악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고, 프랑스 방송 교향악단의 명예 감독에 올랐다.서울시향과의 도전, 그리고 현재
서울시향 개편을 주도하며 국내 클래식 수준을 끌어올렸고, 여러 논란 속에서도 도이치 그라모폰과의 계약 등 성과를 냈다. 현재는 세계 주요 오케스트라에서 지휘를 이어가며, 정명훈만의 기품 있는 음악 세계를 펼치고 있다.
정명훈, 대한민국이 낳은 세계적 지휘자
대한민국에서 정명훈을 묻는다면 분명 이 셋 중 한 명일 것이다. 개그맨 정명훈이거나, 프로게이머 정명훈이거나, 아니면 오늘 알아볼 음악가 정명훈일 것이다. 이번에는 대한민국이 낳은 최고의 지휘자 정명훈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피아니스트로 시작하여 지금은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세계 무대에서 한국을 빛내는 음악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피아노 신동에서 음악가로의 성장
1953년 1월 22일 전쟁의 포화 속에서 정명훈은 4남 3녀의 여섯째로 태어났다. 일찍이부터 피아노 연주에 재능을 보여 5살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고, 7살이 된 해에는 서울 시립 교향악단과 협연을 했을 정도로 피아노계의 신동이었다.
그의 유년기를 이야기하는 데에는 그의 어머니 이원숙 여사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아이를 잘 키운다는 의미는 아이를 사회적으로 성공시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으로 키워내는 것, 자녀 교육의 궁극적 목적은 여기에 있어야 한다"라고 자서전에 이야기했을 정도로 헌신적인 어머니였다.
정명훈이 8살이 되던 해, 그의 가족은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교육 환경을 위해 미국 시애틀로 이주하게 된다. 정명훈은 이 당시를 "부모님의 식당에서 부엌일을 도왔고, 새벽 신문 배달과 잔디 깎기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라고 회고할 정도로 힘든 나날이었지만, 그의 음악 인생의 본격적인 시작이기도 하였다.
세계 무대로의 진출과 피아니스트로서의 성공
정명훈은 14살이 되던 해 시애틀에서의 첫 리사이틀을 시작으로 1968년에는 뉴욕 매네스 음악원에 입학하게 된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배우게 되며 지휘도 함께 공부하게 된다. 그처럼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던 그의 누나들, 첼로의 정명화와 바이올린의 정경화의 피아노 반주자로 인지도를 쌓기 시작했고, 1973년에는 서독 뮌헨의 ARD 음악 콩쿠르에서 2위에 입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명훈이 세계적 명성을 가지게 된 것은 차이콥스키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2위 입상부터이다. 차이콥스키 콩쿠르는 퀸 엘리자베스와 쇼팽 콩쿠르와 함께 소위 세계 3대 콩쿠르 중 하나로, 지금까지도 유서 깊은 콩쿠르로 인정받고 있다. 이런 콩쿠르의 준우승은 당연히 대한민국의 경사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김포공항에서부터 서울시청까지의 카퍼레이드를 열어주었고, 그를 축하해 주는 수많은 시민들의 환호와 오색 종이비는 금의환향이 아닐 수 없었다. 이를 원동력 삼아 같은 해 10월 카네기홀에서 독주회를 가졌고, 다음 해에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무대를 갖는 등 정명훈의 주가는 급상승하게 된다.
지휘자로의 전환과 세계 무대 진출
피아니스트 정명훈은 줄리어드 음대를 시작으로 지휘자 정명훈으로의 두 번째 인생을 꾀하게 된다. 1978년 줄리어드를 졸업하고 이탈리아의 거장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가 상임으로 있는 LA 필의 부지휘자로 들어간다.
정명훈은 LA 필에 있던 3년 동안 상임인 줄리니와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고 하는데, 오히려 이것이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하루는 교향곡의 해석을 묻기 위해 지휘자 줄리니를 찾아갔는데, 지휘자 줄리니는 다시 생각해 보고 내일 오라고 하였다. 다음 날 찾아갔더니 줄리니는 "좋은 해석은 시간이 걸리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정명훈만의 지휘 스타일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LA 필을 나오고 1980년대에 들어서는 뉴욕 필, 빈 심포니, 런던 필 등 여러 오케스트라의 객원 지휘자로 활동하며 그의 입지를 다졌고, 베르디, 푸치니, 모차르트 음악을 통해 오페라의 견문을 넓히는 데도 힘을 썼다.
프랑스와의 깊은 인연
1989년에는 프랑스 바스티유 오페라의 초대 음악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그의 첫 오페라 음악 감독이었기에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고, 그랬기에 임기 초기만 해도 혹평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노련함을 통해 점차 상황은 나아졌고, 프랑스 현대 작곡가인 올리비에 메시앙의 작품 연주를 중심으로 그의 영향력을 넓혀갔다.
바스티유 오페라 음악 감독은 정치적인 이유로 1999년에 물러나게 되고, 2000년에는 대신 연장선 성격인 프랑스 방송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으로 부임한다. 음악 감독으로는 2015년까지 무려 15년간 재직하였으며, 퇴임 이후에는 최초로 명예 감독이라는 호칭이 붙었을 정도로 방송 교향악단의 수준을 상승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이처럼 그는 프랑스에 대한 연이 깊고, 그래서인지 라벨, 베를리오즈, 생상스와 같은 프랑스 작곡가에 대한 애착과 특유의 해석으로 유명하다.
서울시향과 함께한 도약과 도전
2005년 정명훈은 서울시향의 예술감독이자 상임지휘자로 취임하게 된다. 지휘자 정명훈이 오랫동안 꿈꿔온 한국의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를 만들기 위한 첫걸음이었는데, 취임하자마자 그는 대대적인 서울시향의 개편을 진행한다.
기존 단원들의 평가를 위해 단원 평가제를 도입하였고, 공개적인 오디션을 통해 새로운 음악인들을 유입시켰다. 이로 인해 강한 반발에 부딪힌 것도 사실이고, 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생긴 것도 사실이지만, 결론적으로는 그간 침체되어 있던 서울시향의 부활을 도모하는 기회가 되었다.
정명훈은 서울시향을 넓고 또한 깊은 레퍼토리를 소화할 수 있는 연주단체로 끌어올리면서, 동시에 도이치 그라모폰과의 꾸준한 계약도 성사시키며 서울시향의 새로운 도약을 이뤄낸다. 그러나 그의 임기 후반에 가서는 그의 연봉을 비롯한 혜택에 대한 여러 논란들이 있었고, 2013년 서울시향 박현정 대표의 성추행 파문에 연루되면서 서울시향과의 마지막은 그렇게 순탄치만은 않았다.
이 당시 있었던 사건 및 논란들은 정명훈 및 그 주위 사람들의 잘못도 있었고, 잘못 알려져 부풀려진 면들도 있지만 개인마다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이 정도만 다루기로 하겠다.
정명훈의 음악 세계와 현재
정명훈은 2015년을 마지막으로 서울시향과의 연을 마무리 짓고, 현재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도쿄필, 원 코리아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꾸준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어려운 형편에서 음악을 공부해 왔고, 지휘자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를 거쳐 프랑스 방송 교향악단, 서울시향,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등 수준급 오케스트라와 함께해 온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분명 그의 음악 인생을 돌이켜 보면 여러 논란들이 있었고, 이 또한 그를 대변하는 하나의 얼굴이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것은 정명훈이 세계적인 지휘자라는 점이다. 이를 위해 그의 화려한 커리어를 열거할 수도 있겠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한 번은 꼭 그의 연주를 들어봤으면 한다. 그의 무대를 보면 담담하지만서도 기품이 느껴지는데, 이는 타 지휘자들과는 확실히 다른 정명훈만의 색깔이다. 그의 색채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며, 오랫동안 정명훈만의 색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Created by 클래식 소개해주는 크랄Clal @classic_clal
CC BY 라이선스 / 교정SENTENCIFY / 편집자 이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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