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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문화/예술

자클린 뒤 프레, 그녀를 기억하며

목차 📚

📌 먼치 POINT

  1. 첼로와의 운명적 만남으로 시작된 음악 인생
    자클린 뒤프레는 4살 때 라디오에서 들은 첼로 소리에 매료되어 첼로를 시작했다. 10살에 장학금을 받으며 음악 교육을 이어갔고, 카잘스와 로스트로포비치 등 거장들의 가르침 아래 세계적인 첼리스트로 성장했다.

  2. 엘가 협주곡과 함께한 전설의 무대
    1963년 프롬스 무대에서 엘가 첼로 협주곡을 연주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 연주는 평가절하되던 곡을 명곡으로 끌어올렸고, 자클린은 런던 필, 뉴욕 필 등 세계 유수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3. 짧지만 깊었던 삶, 그리고 순수한 사랑
    피아니스트 바렌보임과 결혼하며 음악적으로도 황금기를 맞았지만, 다발성 경화증 진단으로 30세 이전에 연주를 중단했다. 병과 싸우며 후학 양성에 힘썼고, 42세로 생을 마쳤다. 음악을 순수히 사랑한 그녀는 지금도 많은 이들의 마음 속에 살아 있다.


첼로와의 운명적 만남

자클린 뒤 프레는 클래식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입니다. 클래식에 관심이 없더라도 첼로에 관심이 있다면 심심치 않게 접했을 그 이름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녀의 음악을 들을 수 없게 되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1945년 영국의 옥스포드에서 태어난 자클린 뒤 프레는 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첼로 선율에 매료되어 첼로를 시작하게 됩니다. 5살부터 본격적으로 예술 학교에 다니며 첼로를 배웠고, 학교를 옮겨가며 실력을 키웠습니다. 10살이 되던 해에 경연대회에서 우승하여 지속적인 장학금을 받게 되었고, 이는 그녀가 당대 최고의 첼리스트들에게 사사받을 수 있는 값진 기회가 되었습니다.

세계적 첼리스트로의 도약

영국의 저명한 첼리스트이자 그녀의 첫 번째 멘토였던 윌리엄 플리스를 시작으로, 첼로의 거장 파블로 카잘스, 그리고 소련의 로스트로포비치까지. 그녀는 최고의 스승들에게 배웠습니다. 냉전 시대였음에도 첼로를 향한 자클린의 사랑은 국경과 이념을 뛰어넘는 무조건적인 것이었습니다.
자클린의 인생은 탄탄대로와 같았습니다. 그녀는 여러 연주회와 대회를 휩쓸며 음악계는 물론 대중들에게까지 각광받는 첼로 천재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던 중 1963년, 자클린에게 일생일대의 중요한 순간이 찾아옵니다. 바로 영국의 유서 깊고 대중적인 클래식 축제인 프롬스(Proms) 무대였습니다.

엘가 첼로 협주곡: 역사를 바꾼 연주

자클린은 프롬스 무대에서 엘가의 첼로 협주곡 E단조를 연주하게 됩니다. 당시 엘가가 영국의 국민 작곡가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첼로 협주곡은 평가가 좋지 않은 작품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자클린은 이에 굴하지 않고 역대급 명연을 선보였고, 그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대중은 물론 평단들의 찬사 속에서 그녀의 인지도는 영국을 넘어 세계로 확장되었습니다. 이 무대를 계기로 자클린은 스타 반열에 올라 런던 필하모닉, BBC 교향악단, 뉴욕 필하모닉 등 무수히 많은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세계적인 첼리스트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바렌보임과의 운명적 사랑

1966년 크리스마스, 자클린은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을 만나게 되었고, 이듬해인 1967년 결혼에 골인합니다. 사실 그녀의 결혼에 대해 주위 사람들은 많은 우려를 표했습니다. 당시 바렌보임은 자클린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음악가였고, 무엇보다 유대교 신자였기 때문입니다.

자클린은 스스로 유대교로 개종하면서까지 바렌보임과의 결혼을 선택했고, 그만큼 그를 깊이 사랑했습니다. 두 사람은 1960년대에 활발한 듀오 활동을 이어나가면서 음악적으로 최고의 연주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실제로 자클린의 많은 명연주들이 이 시기에 탄생했으며, 그녀에게는 황금기와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이 부부는 핀커스 주커만과 같은 당대 최고의 연주자들과 함께 활동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갑작스러운 시련: 다발성 경화증

하지만 행복했던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연주가 예전보다 잘 되지 않고 몸이 뻐근해지는 증상을 단순한 피로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심각해져 쇼핑 중 갑자기 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할 정도까지 이르렀습니다.
의사의 진단 결과는 다발성 경화증이었습니다. 이 질환은 뇌와 척추 사이에 생긴 염증으로 인해 발생하며, 사람마다 증상은 다르지만 주로 실명, 운동 장애, 그리고 신체의 마비로 이어집니다. 자클린은 여러 치료를 시도했지만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고, 결국 공연에서 심각한 실수를 범하기에 이릅니다. 1973년, 그녀는 모든 연주와 음반 작업을 중단했습니다.


마지막 나날들과 음악적 유산

어려운 시간을 보내던 자클린에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남편 다니엘 바렌보임의 외도였습니다. 1975년부터 파리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게 된 바렌보임은 집에 없는 시간이 많아졌고, 자연스럽게 별거 상태로 이어졌습니다. 자클린 역시 어느 정도 이러한 상황을 용인했는데, 거동조차 힘든 자신을 간호하는 남편의 상황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바렌보임과의 관계 변화 속에서도 자클린은 남은 시간 동안 후학 양성에 몰두했습니다. 비록 스스로 연주할 수는 없었지만, 다른 이들이 그녀의 염원을 이어가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1975년부터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병이 악화되었고, 결국 1987년 4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음악을 순수히 사랑한 연주자로 기억하며

자클린 뒤 프레를 추억하는 글에서는 종종 '비운의 천재'라는 수식어를 볼 수 있습니다. 20세도 채 안 되는 나이에 세계 정상급 첼리스트가 되었고, 잊혀진 엘가 첼로 협주곡을 명곡의 반열에 올렸지만,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불치병으로 30세도 채 안 되어 첼로계에서 은퇴하고 42세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운의 천재'라는 표현은 자클린 뒤 프레에게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우리가 그녀를 기억하는 이유는 그녀의 굴곡진 인생사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그녀를 기억하고 추억하는 진정한 이유는 그녀가 음악을 순수하게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저 좋아서 하는 것, 좋아서 하는 것에 그 이상의 이유가 필요할까요?
언제나 해맑았던 자클린 뒤 프레의 웃음이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비운의 천재' 자클린 뒤 프레가 아닌, '음악을 순수히 사랑한' 자클린 뒤 프레로 그녀가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Created by 클래식 소개해주는 크랄Clal @classic_clal
CC BY 라이선스 / 교정SENTENCIFY / 편집자 이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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