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가 말하지 않는 것
📌 먼치 POINT
애도받을 자격과 무고함의 정치적 딜레마
『소년이 온다』는 무고하고 순결한 시민들만을 피해자로 그려내며, 불량학생이나 적극적 저항자들은 배제함
주디스 버틀러의 관점에서 볼 때, 고통받는 사람들이 무결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국가 폭력 자체가 문제의 핵심
광주 담론은 군부독재 시절 '폭도'에서 민주화 이후 '무고한 희생자'로 변화했지만, 여전히 '무고함'이 애도의 조건이 됨
광장의 복수성과 신체의 정치적 가능성
실제 광주 시민들은 다양한 동기와 배경을 가졌으며, 무장투쟁 여부나 계층 갈등 등으로 내부 분열도 존재했음
2024년 계엄 상황에서 보듯 취약한 시민의 몸들이 오히려 정치적 힘을 발휘할 수 있음
광장은 '자유'나 '민주주의' 구호로 결집하지만 내부의 불화와 경합이야말로 집회의 본질적 특질
불완전한 애도와 원한의 윤리
- 한강은 국가적 복권과 배상이 이루어져도 완전한 고통의 청산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함을 보여줌
- "과거는 잊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요청 자체가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음
- 2020년대 재독해를 통해 소설이 말하지 못했던 광장의 다성성과 복합성을 읽어내야 함
애도받을 자격과 무고함의 딜레마
『소년이 온다』에는 무고하고 선하며, 깨지지 않은 유리 같은 영혼을 가진 시민들이 나온다. 무기를 탈취한 소년들은 막상 계엄군과의 대치 상황에서 총 한 발 쏘지 못할 만큼 깨끗하다. 그런데 만약 그 소년들 틈에 평소 후배들을 때리고 돈을 빼앗는 불량 학생이 있다면 어땠을까? 그 학생이 정말로 계엄군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죽는다면?
주디스 버틀러는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을 탐구한 『전쟁의 프레임들』에서 사회가 모든 죽음을 똑같이 애도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1980년 광주 시민들의 죽음을 둘러싼 우리나라 국가 담론의 변화는 이 점을 잘 보여주는 실례다.
광주 담론의 변화와 애도의 조건
군부독재 정권 시절, 광주의 사망자들은 이른바 '소요 사태'에 개입한 소수의 폭도들로 처리되었다. 민주화 이후 진상 규명을 위한 노력이 국가의 시민 학살에 대한 공식적 인정으로 이어졌고, 시민들의 죽음은 2010년대 초에 행정적·사법적 차원에서 복권되었다. '그럴 만한 죽음'이 '억울한 죽음', '애도받을 만한 자격과 가치가 있는 죽음'으로 이른바 격상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조금 미묘한 지점이 있다. 애도의 자격을 얻기 위해서 계엄군이 죽인 사람들 대다수는 폭도가 아니라 무고한 희생자라는 점이 부각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중에는 군경의 선제적 강경진압과 언론의 사건 은폐에 맞서기 위해 화염병을 던지고 파출소를 습격하고 차량을 탈취한 시민도 분명히 있었다.
그럼 죽여도 되는 건가? 버틀러가 광주항쟁을 알았다면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시민이 군경에게 야유를 보냈다. 그러면 군경은 시민을 때려도 되는 건가?
『소년이 온다』가 빠져나가기 어려웠던 딜레마
『소년이 온다』가 빠져나가기 어려웠던 딜레마는 여기서 발생한다. 너무도 무결한 시민들이 피해자가 되기 때문에 독자가 느끼는 분노의 근원은 '이토록 무결한 사람들이 고통받는다'는 사실과 분리되기 어렵다. 하지만 버틀러라면 단호하게 말할 것이다. 고통받는 사람들이 무결하다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폭력의 주체가 국가 군인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후배를 때리거나 차량을 훔친 것은 그에 상응하는 사법적 처벌이나 물리적 제지를 받아야 할 일이지, 군인의 총에 맞아도 될 이유가 아니다. 총을 맞은 사람이 소년이든 일진이든 차량 탈취범이든 폭력은 폭력이고 학살은 학살이다.
작가의 고민과 선택
한강 작가도 이 점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저항권을 행사한 시민들의 존재를 너무도 잘 알고 고민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에필로그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한강은 광주의 사망자들이 '영웅'이라든가 '희생자'라든가 하는 단수의 이름으로 환원되기를 원하지 않았고, 그래서 각 장에서 각기 다른 인물들을 서술자로 삼아 시민들의 개별성과 복수성을 강조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그런데도 한강은 무고하지 않은 시민들을 전경화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는데, 그건 아마 "아무도 내 동생을 모독할 수 없도록 써 달라"는 유족의 요구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 소설이 출간된 2014년은 광주에 대한 국가적 복권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광주 시민들은 폭도'라는 모독이 민간에서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광주를 5·18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해 "폭도였으면 뭐 어쩔 건데?"라는 말보다는 "폭도가 아닌 사람이 더 많았는데"라는 말이 더 시급해 보이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2020년대 재독해: 다성화의 확장
하지만 10년 후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받으면서 『소년이 온다』를 새롭게 읽는 독자들이 늘기 시작했다. 같은 해에 선포된 계엄령이 1980년의 계엄 상황과 그 이후를 다룬 이 소설을 다시 주목시키기도 했다. 그렇다면 2020년대에 『소년이 온다』를 읽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광주에 대한 모독에 계엄령의 정치적 후폭풍이라는 레이어가 한 겹 더 쌓인 이 시대에, 우리는 2014년에 소설이 말해야 했던 것과 말하지 못했던 것을 함께 읽어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광장의 복수성과 불화
이런 맥락에서 『소년이 온다』를 다시 읽는 첫 번째 방법은 한강이 경주한 다성화의 노력을 확장하는 것이다. 『소년이 온다』 출간 당시에는 이 책이 기존 5·18 소설들에 비해 시민들의 섣부른 영웅화를 경계한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 소설은 국가 폭력 이후 생존자들에게 남은 상흔을 추적하는 방식으로 현재화된 고통의 다양성에 주목하고 있다.
시민들이 거리에 나선 이유가 옆 사람이 죽은 것에 대한 충격과 분노, '그냥 그래야 할 것 같다'는 느낌 등 정치적 저항 의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도 보여준다. 하지만 서사가 도청에 남은 최후의 시민군을 초점화한 4장에서 이런 동기들은 '양심'이라는 강력하고 순고한 감정을 향해 수렴하는 것 같기도 한다.
그러면 '민주화의 영웅'이라는 기호가 '양심적인 영혼'이라는 기호로 대체됐을 뿐, 소설이 또 다른 단순화의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볼 수 있다. 연구 결과는 계엄군이 잠시 퇴각한 시기 시민들의 시위 경험이 분화되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시민들 중 폭도가 섞여 있다는 계엄군의 선전이 분열을 촉진했고, 무장 투쟁 여부를 두고 대립하거나 빈민들의 시위 참여에 불안해하는 일부 시민들도 나타났다.
중요한 건 이런 진정한 통합의 불가능성, 다성과 복합성이 만드는 균열이 집회 일반의 주요한 특질이라는 것이다.
신체의 가능성과 불완전한 애도
계엄령 이후 대통령 탄핵 집회에 참여한 분들이라면 때로 농민, 노동자, 장애인, 성소수자들이 연단에서 일견 계엄과는 조금 무관해 보이는 이야기를 하는 것에 의아함을 느끼거나 실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은 바로 그것이 광장의 핵심이다. 내부에서 끊임없이 불화하고 경합하는 여론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구호는 언제나 불안전한 중심일 수밖에 없다는 것.
취약한 몸들의 정치적 힘
그렇다면 오늘날 『소년이 온다』의 생산성은 수렴보다 발산의 힘에 있을 수도 있다. 광장이 '자유'나 '민주주의' 같은 구호로 결집할 때 각기 다른 사람들이 그 느슨한 구호에 동의하게 만든 각양각색의 계기, 해석, 욕망들을 상상해보자는 것이다.
물론 신체는 취약하다. 이 소설도 사실은 거기에 더 집중하고 있다. 고문당하는 시민에게 신체는 벗어나고 싶은 감옥이고 국가의 폭력이 반영구적으로 각인되는 장소다. 그러나 '신체의 가능성'이라는 말은 신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정치적 실천들이 오직 신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의미다.
2024년에 계엄 상황을 회고해 보자. 계엄군이 국회 의사당에 들이닥쳤고 그것을 몸으로 막아선 시민들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무장 군인이 시민을 제압하는 건 마음만 먹으면 일도 아니라며 군인들의 소극적 행동에 찬사를 보냈다. 이런 평가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자리에 나왔던 시민들의 몸이 취약하기 때문에 무의미하다는 생각에는 반대한다.
군인들이 망설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자신들을 가로막는 무언가가 윤리적·정치적으로 처치 곤란할 만큼 취약한 몸들이었기 때문이고, 그 몸들이 없었다면 의도적인 늑장 작전은 훨씬 더 어려운 과제가 되었을 수도 있다.
원한의 윤리적 의미
그러나 우리가 어느 시점에 이 소설을 읽건 기억해야 할 점은 『소년이 온다』가 일차적으로 1980년 광주와 그 이후의 고통을 말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죽은 이의 원한은 죽어서도 해소되지 못하고, 산 자의 영혼은 살아남은 몸을 지옥으로 여기는 고통을 말이다.
한강은 이들의 원한과 고통을 청산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봉합과 화해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나아가 "과거는 잊고 건설적인 미래를 향해 다 함께 나아가자"는 요청이 또 다른 폭력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치열하게 직시한다.
이미 국가 폭력에 대한 공식적 책임 인정과 배상이 이루어진 상황에서 뭘 더 해야 만족할 거냐? 만족할 수 없다. 만족할 수 없다. 물론 피해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뿐 아니라 과거에 책임지기 위해서 국가와 사회는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완전한 고통의 청산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국가화된 폭력은 언제나 한 개인의 다른 개인에 대한 위해라는 구체적·개별적 실체를 익명화하고 집합화하고 추상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국가가 뭘 더 해주면 만족할래"라는 질문은 사실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이제 새 출발을 하자"라고 말하기 전에 국가가 아무리 뭘 더 해 줘도 그날 이전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마무리가 아니라 출발을.
맺으며: 소년이 온다가 말하지 않는 것들을 읽어내기
『소년이 온다』는 무고한 시민들의 애도받을 만한 죽음을 그려내면서도 동시에 애도의 자격을 묻는 근본적인 딜레마를 안고 있다. 한강이 선택한 순결한 시민들의 서사는 2014년 당시의 정치적 맥락에서는 필요했지만, 2020년대의 독자들에게는 새로운 읽기를 요구한다. 광장의 복수성과 불화를 인정하고, 취약한 몸들의 정치적 가능성을 탐색하며, 완전하지 않은 애도와 원한의 윤리적 의미를 성찰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 작품이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우리가 읽어내야 할 방향이다.
Created by 방구석인문학도
CC BY 라이선스 | 교정 SENTENCIFY | 에디터 이다은
방구석인문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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