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기괴한 풍습들: 역사 속에 숨겨진 충격적인 의식들
📌 먼치 POINT
1. 죽음과 함께했던 ‘순장’ 풍습
순장은 죽은 권력자를 위해 산 사람을 함께 묻는 풍습으로, 한국, 중국, 이집트, 바이킹 사회 등에 존재했다.
대가야 고분에서 30명이 넘는 순장자가 발견되는 등 강제성과 비극성이 짙었다.
진시황릉, 파라오 무덤 등 대규모 순장은 사후 세계 신앙과 도굴 방지 목적도 있었다.
2. 두개골을 변형한 ‘편두’ 문화
아기 때부터 머리를 눌러 특정 형태로 두개골을 변형하는 관습으로, 신분 구별, 미의 기준, 소속감 표출 등의 목적이 있었다.
치누크족, 마야 문명, 이집트 등 전 세계에서 확인되며, 한국과 일본에서도 편두 유골이 출토되었다.
외계인을 닮은 두개골로 오해받기도 하나, 실은 고대의 ‘성형 문화’였다.
3. 이를 검게 칠하는 ‘흑치’ 풍습
일본의 오하구로, 베트남·태국·아프리카의 흑치 풍습은 검은 치아를 미의 기준이나 성숙의 상징으로 여겼다.
철 성분 용액으로 칠하거나, 구강 소독 후 검은 염료를 바르는 등 방식도 다양했다.
식민지 시기 이후 서구 미의식에 밀려 사라졌지만, 여전히 소수 지역에 남아 있다.
들어가며

세상에는 여러 가지 전통들이 존재한다. 또 여러 가지 풍습들도 존재하는데, 이런 풍습들 중에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도 있지만 여러 문제로 인해 사라진 풍습들도 존재한다. 오늘 소개할 이야기는 세계의 기괴한 풍습들에 관한 이야기다.
보시기에 따라 불쾌할 수도 있는 묘사나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미리 알려둔다. 하지만 이러한 풍습들은 인류 역사의 한 부분이며, 과거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죽음과 함께하는 순장 제도

죽은 사람을 떠나보내는 장례식은 세계 어디에서든 다양한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일반적인 매장이나 화장을 넘어서 최근에는 수목장 등도 꽤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아주 오래전에는 이런 장례 형태 중에서도 독특하고 또한 충격적이었던 장례식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순장이라 불리는 장례였다. 이 순장은 한자로 따라 죽을 순, 장사지낼 장이다. 말 그대로 죽은 사람과 따라서 묻히는 것으로, 사람이 죽으면 살아있는 사람을 같이 매장하는 형태였다.
특히 권력자의 죽음에 이 순장 제도가 동반되었다. 사후에도 삶이 이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에 권력자의 소유였던 하인들이 함께 묻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당연히 누구도 살아서 갑자기 죽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예외적으로 자발적인 순장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 순장은 희생을 강요받거나 혹은 강제로 끌려와 저항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국과 중국의 순장 역사
그래서 순장으로 예상되는 매장지에서 발굴된 유골들 중에는 두개골 부분에 인위적으로 깨진 상처들이 존재하거나 유골의 목 부분에 밧줄이 남아 있는 등 명백히 원하지 않는 순장을 당한 흔적들이 있었다고 한다.
한국에도 순장 풍습이 존재했었다. 부여, 가야, 신라에서 순장이 행해졌었다고 하는데, 특히나 대가야 시절에 이런 순장이 활발했다고 한다. 대가야의 한 고분에서는 순장자가 무려 30명이 넘게도 발견되었고, 이들 중에는 사망 당시 아직 10살도 채 되지 않은 유골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강제로 끌려왔음을 시사하기도 했다. 가야는 거의 마지막까지 순장을 유지해 왔다고 하는데, 진흥왕에 의해 정복당한 뒤에는 순장 제도가 마침내 종식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한다.
중국에서도 순장 제도가 꽤 활발했었다. 상나라 시절에 순장이 굉장히 널리 벌어졌지만 주나라에 의해 멸망당하며 순장제가 사실상 사라졌다. 사람 대신에 인형 등을 넣는 것으로 변경되었는데, 이것은 윤리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당시 순장을 한 번 할 때마다 많게는 수십 명씩의 사람들이 희생되었기 때문에 인구가 줄어드는 것을 최대한 막기 위해서였다.
진시황제와 이집트의 대규모 순장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진시황제의 무덤일 것이다. 진시황의 장례식에는 엄청난 규모의 순장이 이루어졌는데, 이들 중에는 진시황의 측근뿐만이 아닌 무덤 건설에 참여한 이들, 군사, 관리, 건설 장인, 인부, 노예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한 번에 순장되어버리고 말았다. 가장 큰 이유는 도굴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나마도 앞서 말한 부작용으로 인형을 넣는 것이 일반적이었기에 수많은 사람 대신 진짜 사람을 본뜬 병마용을 넣음으로써 이 정도로 끝나게 될 수 있던 것이라고 한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대규모의 순장이 행해지기도 했다. 이집트 제1왕조의 파라오 제르의 무덤에서는 무려 500구가 넘는 순장 시신들이 발견되었으며, 4대 파라오 제트의 무덤에서는 약 230구, 5대 덴 왕의 무덤에서도 비슷한 수의 순장자가 발굴되었다. 나중에는 나무나 도자기로 만든 인형으로 대체되었는데, 사후 세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집트인들의 특성상 권력자가 죽어서 내세에서 섬김을 받을 수 있도록 아주 많은 사람을 순장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바이킹의 독특한 순장 의식
바이킹의 순장 풍습은 대단히 독특했다. 족장이 사망하면 노예 중 한 명이 자원하여 장례를 치룬다. 그리고 죽은 족장의 재산을 정확히 3등분하는데, 하나는 유족에게 남길 유산, 하나는 장례를 치를 비용, 그리고 하나는 순장될 노예를 위해서 쓰였다.
보통 족장과 함께 순장되는 노예는 여성이었다. 열흘 동안 3등분된 족장의 재산으로 장례를 준비했다. 특히 노예에게 열흘간 최고의 대접을 해줬다고 한다. 소설이나 영화 등에서 의식의 제물이 될 대상에게 마지막으로 크게 호강을 시켜주는 설정과 비슷하게 열흘 간 가장 좋은 옷, 가장 좋은 음식, 술을 대접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시간이 되면 노예에게 가장 독한 술을 먹이고 의식을 흐리게 만든 뒤에 최대한 빨리 목숨을 거뒀다. 그 후 숨진 노예의 시신과 족장의 시신을 배에 함께 태운 뒤 배에 불을 지르고 물에 띄워 보냈다고 한다. 이렇게 순장이란 풍습 하나에도 참 다양한 형태가 존재했다.
외계인을 닮은 기괴한 두개골의 비밀

사진 속의 두개골은 정말 기묘해 보인다. 마치 SF 영화 등에 나오는 외계인의 유골처럼 보이기도 한다. 정말 지구에 방문했던 외계인의 해골이었을까? 사실 이 두개골은 외계인이 아닌 인간의 두개골이다. 이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형태로, 이런 모양의 머리를 만드는 풍습이 따로 있었다. 바로 편두라고 불리는 풍습이었다.
편두의 편은 '편편할 편'이라는 한자를 쓴다. 이에 걸맞게 편두를 하는 과정 역시도 대단히 특이했다. 우선 이 편두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행해지게 된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뼈가 물렁한 갓난아기 때부터 납작한 돌이나 판자 등을 이마와 뒤통수에 대고 끈 등으로 묶어서 두개골의 모양을 서서히 변형시킨다. 그렇게 해서 머리뼈가 편두의 모양으로 고정이 되면 나중에 나이를 먹어서도 이 특이한 형태가 유지된 채로 성장한다.
편두의 역사와 목적
이 편두의 역사는 생각보다 아주 오래되었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역사가 기록되기 전, 즉 선사시대부터 수행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역사적으로 쓰여진 편두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원전 400년경 히포크라테스가 쓴 기록이라고 한다. 히포크라테스는 이 편두에 관해 '마크로세팔리', 한국어로 대두증을 가진 부족에 관해 서술했다고 한다. 당연히 이 대두증이라는 단어는 그들의 두개골 변형, 바로 편두형 머리를 보고 지칭한 단어였다.
그렇다면 굳이 이런 편두를 왜 했는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학자들은 이에 관해 여러 가지 가설을 내놨다. 전투를 할 때 화살 등에 머리가 공격당할 가능성을 낮추기 위해서, 과거 사람들의 미의 기준이 지금과는 무척 달라서, 민족적인 동질감을 나타내기 위해서 등 여러 가지 주장을 내놓기도 했었다.
가장 확률이 높은 가능성은 신분 구별이라고 한다. 즉 편두를 한 사람과 그냥 평범한 두상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다른 신분 계급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세계 각지의 편두 사례들
실제로 북아메리카의 원주민이었던 치누크족은 계급 사회 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고위 계급과 하층 계급의 구분을 나누기 위해서 고위 계급의 아이들에게 태어나자마자 편두를 실시했다. 그래서 고위 계급은 편두, 하층 계급은 평범한 두상이었으며, 치누크족이 아닌 외부인이어도 평범한 두상을 가진 이들을 하층 계급처럼 바라보고 천시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치누크족과 마야족이 편두를 만들었던 방법은 이렇다. 편두 모양을 잡기 위해 고안된 판자 2개의 사이에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를 눕혀놓고 키운다. 그래서 아이의 머리는 자연스럽게 편두 모양으로 자라나며 모양이 굳어진 후에는 성인이 되어도 편두가 유지된다. 마야 사회에서도 이런 편두를 통해서 지배계급과 신분을 구별하는 데 사용이 되었다고 한다.
이집트에서도 이 편두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집트는 다른 지역들과는 다르게 독특한 가설이 존재한다. 바로 이 편두 모양의 머리를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닌 자연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이들이 존재했다는 주장이다. 편두 모양처럼 길쭉한 형태의 두상을 가진 이들이 있었고, 이 집단을 모방하려 편두가 이루어졌다고 간주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편두 흔적
의외로 우리나라에서도 이 편두가 행해진 흔적이 있었다. 김해시의 어느 고분에서 편두 인골이 출토되었으며, 또 경산시 임당동의 고분에서도 편두 유골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앞 이마 부분이 후퇴한 현상을 보여줬기에 보통 이루어진 나무 판자 등으로 누르는 방식과 다르게 이마를 돌 같은 것으로 눌러 편두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들의 두개골 머리 둘레는 약 50cm 정도로 평균적 둘레인 57cm보다도 더 작게 측정되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이 편두가 실행되었다는 증거가 있었다. 바로 일본 남부의 다네가시마 섬의 일부 유골들 중에 편두를 한 유골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약 3세기경부터 7세기경까지 히로타족 사이에서 행해졌다. 학자들은 이 히로타족의 편두는 집단 정체성을 표현했을 것으로 예상했다. 이들이 조개껍질을 이용해 만든 장신구를 거래한 증거가 있었으며, 이런 거래 등을 할 때 타 지역 사람들과 자기 부족을 구분하기 위해 편두를 했다는 것이다.
사실상 고대부터 행해졌던 일종의 성형으로 봐도 될 듯하다. 일부에서는 이 편두가 지구를 방문한 외계인의 두상을 지구인이 모방하기 위해 행해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나름대로 또 흥미로운 주장처럼 들리기도 한다.
치아를 검게 칠하는 흑치 풍습

흑치는 말 그대로 이를 검게 변하게 만드는 풍습이었다. 지금은 하얀 치아가 이미지도 깔끔하고 그렇기 때문에 치아 미백을 하는 경우가 아주 보편적이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한때 이 치아를 완전히 까맣게 만드는 것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던 적이 있었다.
일본과 베트남, 태국 등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과 일부 아프리카 지역에서도 이 흑치 문화가 퍼져 있었다. 이 흑치는 보통 사춘기 시절에 주로 행해졌다고 한다. 사춘기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시기가 보통이었다. 왜냐하면 이 흑치가 가지는 의미가 성숙함, 아름다움, 문명의 상징 등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또 흑치를 할 때는 치아를 일부 갈아냄으로써 치아 모형을 변형시키는 등의 행위도 함께 이루어졌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인조 치아를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거의 대부분 사라지기는 했지만 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 지역의 일부 소수 민족 등에게선 여전히 전해지는 풍습이라고 한다.
일본의 오하구로 문화
흑치 풍습이 사라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서구 열강에 의해 식민지화가 되면서였다고 추정된다. 흑치가 수행되던 지역을 식민지배하던 서양 국가들이 이 흑치에 대해 호불호가 많이 나뉘기도 했었고, 서구식 미의 기준이 도입되며 대부분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아시아 지역에서 이 흑치가 가장 활발하게 진행된 곳은 다름 아닌 일본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일본에서는 이 흑치를 지칭하는 단어가 따로 있었으며 일본어로는 오하구로라고 불렀다. 다른 말로는 치아를 검게 한다는 뜻의 하구로메, 금속을 붙인다는 뜻의 가네츠케 등으로도 불렸다.
그런데 금속을 붙인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바로 이 흑치를 할 때 사용되는 재료 때문이었다. 일본에서는 이를 검게 칠할 때 가네미즈라는 것을 사용했다. 이 가네미즈는 한국말로 하면 철은 물 정도가 된다고 한다. 말 그대로 철로 만들어낸 용액을 뜻한다.
가네미즈 제조법과 흑치의 목적
이 가네미즈 제조에 관해 기록을 남긴 외국인도 있었다. 과거 일본을 방문했던 엘저넌 버트럼 프리먼 미포드는 1871년에 출간된 자신의 저서 『일본 이야기』에서 에도 지역의 가네미즈 제조 전문 약제사가 한 말을 인용했다.
우선 물 3컵을 따뜻하게 데운 후에 청주 반컵을 넣고 이 혼합물에 뜨겁게 달군 쇠를 며칠간 담가둔다. 그러면 이 혼합물 표면에 찌꺼기들이 생기는데 이 찌꺼기를 찻잔에 따로 따라두고 불 위에 올려둔다. 이것이 뜨거워지면 오배자 나무 가루와 철가루를 섞은 뒤 다시 한 번 가열하여 순수한 가네미즈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접착력을 위해 송진 등을 섞어 바르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흑치를 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미적인 목적을 위해서였다
고 전해진다. 당시 일본 여성들의 화장은 얼굴을 아주 새하얗게 칠하고 눈썹을 굵고 짧게 칠한 뒤 입술은 빨갛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직 치아 건강 등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여서 하얀 얼굴에 비해 노란색의 치아가 부각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가리기 위해 이를 검게 칠하는 흑치가 행해졌다고 한다. 또한 치아를 코팅하는 역할도 해 줌으로써 치아 건강에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베트남과 기타 지역의 흑치 문화
베트남에서도 이 흑치 풍습이 유행했었다. 대다수 베트남인 그리고 소수 민족인 시라족에서 행해졌다. 보편적으로 이 흑치가 여성들에게서 유행했던 반면에 시라족은 남성들도 이 흑치를 수행했다.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베트남 지역에서의 이 흑치는 약 기원전 400년경부터 행해졌다고 보여진다.
베트남에서 흑치를 만드는 과정은 이렇다. 흑치를 만들기 전 처음에 구강을 깨끗이 소독한다. 이 소독 과정에는 말린 빈랑, 숯가루, 소금을 섞은 것을 썼고 청주와 레몬즙 혼합물로 입을 헹궈냈다고 한다. 이 과정이 오히려 굉장히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깨끗이 소독을 한 뒤에는 코코넛 껍질을 태운 용액을 사용해서 치아에 검게 칠해 흑치를 완성시켰다고 한다.
베트남의 흑치 풍습에 관해서는 여러 기록이 존재한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남겨진 기록도 있었다. 『조완벽전』에선 16세기 인물 조완벽이 베트남에서 목격한 베트남인들의 흑치 풍습에 관해 이렇게 묘사한다. "베트남에서는 남자와 여자 모두 머리를 묶어 다니고 존경받는 사람들은 치아에 옻칠을 하고 다닌다." 아마 흑치에 관한 구체적인 과정을 몰랐기 때문에 치아에 옻나무 수액을 칠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흑치의 다양한 의미와 전파
베트남에서도 이 흑치는 미용적인 목적을 위해서도 쓰였지만 앞서 말했듯이 신분의 구분을 위해서 사용되기도 했다. 또 종교적이고 영적인 의미도 있었다고 한다. 오래전 베트남에서는 하얀 치아가 인간이 아닌 동물, 악령, 야만인에 가깝다는 인식이 있었기에 남녀 구분 없이 흑치를 하는 풍습이 유행했다고 한다.
태국에서도 흑치 풍습은 미의 상징이었다. 인도에서도 이런 흑치 풍습이 존재했었으며, 치아만이 아닌 잇몸까지도 검게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이슬람 문화권에서도 관찰이 되었고, 아프리카에서는 마다가스카르 지역에서도 관찰이 되었다.
생각보다 여러 지역에 걸쳐 이 흑치가 관찰된 것을 보면 어떤 곳에서 처음 시작되어 나중에 퍼진 것이 아닌가 싶은데, 어디서 먼저 시작하고 누가 시작했는지가 참 궁금하다.
마무리하며

오늘 소개해 드린 풍습들 중에는 지금이야 옛날보다 인권 등의 개념이 많이 발달했기에 오래전 풍습을 지금 시대의 기준만으로 판단하긴 어렵겠지만, 지금 보면 비인간적인 풍습도 있었고 또 현 시대의 미적 기준과는 많이 다른 풍습들도 있었다.
이러한 기괴한 풍습들은 단순히 과거의 미신이나 잘못된 관습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 그들은 각각의 시대와 문화적 배경 속에서 나름의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인류 문명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기도 하다. 세계의 기괴한 풍습들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현재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만드는 흥미로운 주제였다.
Created by 미스터리큐브
CC BY 라이선스 | 교정 SENTENCIFY | 에디터 이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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