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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고무신 속 특이한 옛날 문화 TOP5

빠퀴2025.08.12
목차 📚

📌 먼치 POINT

검정고무신 속 특이한 옛날 문화 TOP5

5위: 1960년대 극빈 시절 - 월 소득이 적어 한 끼 해결도 힘든 궁핍한 생활상

4위: 특별한 음식과 간식 - 바나나·원기소·술지개미 등 귀하고 비싼 먹거리의 존재

3위: 야간통행금지 제도 - 자정~새벽 4시 이동 제한으로 치안·안보를 강화

2위: 사라진 직업들 - 엿장수·약장수 등 독특한 영업 방식의 거리 직업군 활약

1위: 놀거리와 핫플레이스 - 만화방·빵집 등 세대별 인기 문화 공간의 번성


검정고무신 속 특이한 옛날 문화 TOP5

검정고무신을 보시면 학교에 대변을 가져간다거나 쥐꼬리를 가져가는 등 '이게 우리나라 맞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기한 문화가 정말 많습니다. 오늘은 검정고무신 속 특이한 옛날 문화 5가지에 대해 알려드리겠습니다. 궁금했지만 자세히는 몰랐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5위: 1960년대 극빈 시절의 현실

70년 전 서울의 모습을 보시면 정말 놀라실 겁니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도로에 소가 다녔습니다. 같은 시기 미국 사진과 비교하면 ‘와’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검정고무신의 주된 배경은 1960년대, 즉 이런 힘든 시절을 배경으로 한 작품입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하루 한 끼 먹기가 힘들었습니다. 북한보다도 못 살았을 정도입니다. 모두를 눈물 짓게 했던 레전드 에피소드, '보릿고개 시련기'만 봐도 이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도 안 갑니다.
회사가 망해서 회사에서 잘린 아빠가, 차마 그 사실을 가족에게 말하지 못하고 하루 종일 밖에서 양말을 팔았죠. 밥 차리기도 어려워서 보리밥으로 때우고, 밤에는 연탄 땔 돈이 없어서 집이 얼음장이었습니다.

기영이와 기철이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친회비를 내지 못해서 학교에서 맨날 혼났습니다. 결국 기철이는 학교 가기 전에 신문 배달을 하기에 이르렀고, 아빠 역시 돈을 조금이라도 벌어보려고 엑스트라 연기를 하며 몸을 혹사시켰습니다. 다행히도 기영이네 가족은 모두 힘을 합쳐 보릿고개를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기준으로 기영이네 집 정도면 꽤 잘 살던 집입니다. 주택도 있고, TV도 있고, 아빠가 회사도 다니고, 똥퍼 아저씨한테 세까지 줬는데요. 월 3천 원 정도의 소득을 가진 중산층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월 식비가 2천 원입니다. 즉, 돈 벌어서 입에 풀칠만 겨우 하는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초반 1인 평균 소득은 월 900원이었습니다. 기영이네와 달리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하는 집이 훨씬 많았다는 것입니다. 1960년대에는 한 해에 굶어 죽는 인구만 140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특히 감기나 배탈에 걸려 죽는 인구는 더 많았습니다. 병원은 상상도 할 수 없었고, 약으로 때우거나 엄마가 손으로 쓰다듬어주는 걸로 끝났죠. '엄마 손은 약손'이라는 말도 여기서 유래했습니다. 저 어렸을 때만 해도 정말 많이 듣던 말인데 요즘에는 듣기 힘드네요.

그나마 기영이네 집처럼 좀 사는 집은 아프면 무당을 불러서 굿을 했습니다. 옛날에는 감기를 귀신이 붙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대한민국은 이렇게 힘든 시기를 거쳐 몇십 년 만에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이 된 것입니다. 정말 뿌듯한 심정이 마구 차오릅니다.

4위: 그 시절의 특별한 음식과 간식들

검정고무신에선 무언가 음식을 먹을 때마다 눈물, 콧물 쭉 빼면서 우는 아이들의 모습이 자주 나옵니다. 어렸을 땐 왜 저러나 했지만, 앞의 내용을 보고 그들의 빈곤한 생활상을 알았다면 이해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검정고무신 먹방’ 하면 가장 유명한 바나나의 가격이 500원에서 1천 원이었다고 합니다. 바나나 한 송이도 아니고 1개에 1천 원입니다. 3개면 3천원, 중산층 한 달 월급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셈이죠. 게다가 이 바나나는 예전에 멸종된 ‘그로미셀’ 종으로, 지금의 바나나보다 훨씬 크고 당도도 높았다고 합니다.

그럼 다른 군것질거리도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원기소입니다. 별 맛 없어 보였는데 아득아득 너무 맛있게 먹고 있죠. 원기소는 당시 유일한 영양제였습니다. 살짝 누릿한 향의 미숫가루를 굳힌 맛 같다고 하는데요. 처음에는 고소한 맛에 끝맛은 살짝 달달하다고 합니다. 요즘으로 치면 유산균 영양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도 비싸서 당시 부잣집 아니면 못 먹었다고 합니다.

둘째, 술지개미입니다. 옛날식 탁주를 빚으면 안에 남는 찌꺼기를 술지개미라고 부릅니다. 1960년대에는 동네마다 양조장이 있어서 쉽게 구할 수 있었다고 하죠.
술지개미는 주로 가축의 사료로 썼지만, 먹을 게 없던 때에는 사카린을 섞어서 밥으로도 먹었다고 합니다. 맛은 식혜와 비슷한데, 은근 달달하고 고소해서 아이들이 몰래 먹었다고 하죠. 대신 알코올 성분이 남아 있어서 많이 먹으면 취한다고 합니다.

셋째, 밀껌입니다. 참 신기했던 ‘껌 만들기’ 에피소드를 보면 껌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껌 씹는다는 소문이 들리니까 아이들이 다 모여드는 것은 물론, 심부름하고 딱 10번만 껌을 씹게 해주고, 한 번 씹기 시작한 껌을 반년씩이나 씹더라고요.
당시 껌은 5원 정도로, 바나나처럼 무지막지한 가격의 간식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지금 물가로 치면 2~3천 원 정도이니, 아이들 입장에서 쉽게 사 먹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껌 대신 밀을 씹어서 껌 느낌을 냈다고 합니다. 밀알의 하얀 속살을 계속해서 씹으면 껌처럼 끈적끈적해지기 때문입니다. 밀가루를 입에 넣고 반죽하는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대신 끈끈함이 약해서 껌처럼 쭉쭉 늘어나지는 않는다고 하네요.

여기서 궁금증이 생깁니다. 검정고무신 먹방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라면 짜장면인데요, 당시 가격은 어땠을까요? 1963년 기준 라면은 10원, 짜장면은 25원이라고 합니다. 요즘 물가로 계산해 보면 라면 6천 원, 짜장면 1만 6천 원 정도의 느낌이겠네요. 요즘도 맨날 먹고 싶은 맛있는 음식들인데, 예전에는 오죽했겠습니까? 지금 시대에 사는 걸 감사하게 생각해야겠네요.

3위: 신기한 야간통행금지 제도

검정고무신을 보면서 정말 신기한 것이 밤만 되면 사이렌이 울리고 모든 사람들이 집으로 들어가는 장면입니다. 심지어 기영이의 약을 사러 나온 아버지도 통금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순찰관들에게 잡혔습니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대체 뭐 때문에 저렇게 하는 걸까요?

이는 야간통행금지 제도 때문입니다. 1945년부터 1982년까지 무려 37년간 진행된 제도인데요, 검정고무신의 배경인 1960년대 기준으로는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가 통금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치안이 좋지만, 과거에는 가로등도 별로 없고 밤만 되면 어두컴컴해서 사건 사고가 많았다고 합니다. 어차피 대부분 잘 시간이니, 범죄를 줄이기 위해 통금을 시행한 거죠. 하지만 우리나라는 전쟁 직후라 밤에 넘어 들어오는 간첩이나 공작원을 막는 목적이 더 컸습니다.

만약 통금 시간에 돌아다니다 걸리면 거동수상자로 체포해서 경찰서에 가뒀다고 합니다. 그래서 경찰서가 거의 여관이나 다름없었다고 하네요.ㄷ 또한 시내에서는 밤 11만 되면 진풍경이 펼쳐졌습니다. 대부분의 가게들이 손님들을 쫓아냈고, 집에 돌아가는 사람들로 버스에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건 모범생들 얘기입니다. 통금하면 외박이 줄어들 거라 했지만 오히려 더 늘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집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각종 폐건물에 들어가서 자기도 헀고, 여관은 빈방이 없어서 못 들어갔다고 합니다. 당시 출산율도 폭증했다고 하죠.
충청북도의 경우 비교적 이른 1965년에 통금이 해제됐습니다. 그래서 접경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충북 지역으로 넘어가 밤새도록 술을 더 마셨다고 합니다. 일종의 핫플레이스였던 거죠. 아마 다시는 경험할 수 없는 문화일 듯합니다.

2위: 추억 속 사라진 직업들

시간이 흐르면서 옛날엔 있다가 사라진 직업이 정말 많습니다. 그중 투톱은 엿장수약장수입니다. 이들은 서민과 가까워서 그런지 재미있는 문화들을 많이 만들어냈습니다.

먼저 엿장수입니다. 1960년대에는 대부분의 엿장수가 고물상을 겸했다고 합니다. 각종 고철은 물론 고무신까지 별의별 물건들을 취급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양심 몇 바꿔 먹었냐' 같은 말이 생겨났습니다. 고물을 받으면 그 값어치만큼 엿을 톡 잘라줬는데요, 얼마나 값어치인지는 엿장수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엿장수 기분이 좋으면 많이 주고 안 좋으면 덜 주는 식입니다.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말도 여기서 비롯됐습니다.

엿치기도 재미있는 문화 중 하나입니다. 엿 가락을 부러뜨린 뒤 그 안에 있는 구멍의 개수, 혹은 구멍 크기로 대결하는 걸 엿치기라고 합니다.

이와 달리 약장수는 아이들이 보기엔 엄한, 다소 위험한 내용이 많습니다. 약장수도 엿장수 못지않은 다재다능한 직업입니다. 이들은 아예 공연을 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주목적은 어디까지나 약을 파는 것이었습니다. 공연으로 사람들을 모은 다음에 그 자리에서 약을 팔았습니다. "심청전 연극 중에 심봉사가 이 약 먹고 눈이 나았다", "차력하다가 배 위로 사람이 걸어갔는데 이 약 먹어서 힘이 세진 거다" 등, 요즘 PPL 못지않게 상술이 엄청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디서 약을 팔아"라는 말이 왜 생겼겠습니까? 이들은 전문 약사가 아니라 사실상 사기꾼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마치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허가도 안 받은 불법 제품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시대 사람들이 사기인 걸 모른 건 아닙니다. 대부분의 노인들은 그 약이 가짜인 걸 알면서도 사줬다고 합니다. 놀거리가 없던 노인들에겐 약장수 공연이 삶의 낙이었기 때문입니다. 참 신기한 문화네요.

1위: 그 시절 놀거리와 핫플레이스

노인들의 놀거리가 약장수 공연이었다면, 아이들은 뭐 하고 놀았을까요?
당시 영화관도 엄청난 핫플레이스이긴 했지만, 가격이 너무 비쌌습니다. 한국 영화 55원, 외국 영화는 무려 70원입니다. 요즘 물가로 치면 영화 하나 보는데 몇만 원을 써야 했던 것입니다. 너무 큰 돈이다보니, 용돈으로도 볼 수 없었죠.

하지만 저렴하게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곳이 있었습니다. 바로 만화방입니다. 만화방의 최전성기는 1960~70년대입니다. 이 기간 동안 전국에 무려 1만 5천 곳에 달하는 만화방이 운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해적판이 많았던 1980년대에 비해, 1960년대에는 정품 작품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드라마로 유명한 각시탈, 레전드 학원물 약동이 시리즈, 어린이들의 우상 땡이 시리즈 등 작품성도 좋고 재미도 있어서 인기가 엄청난 만화들이 많았다고 하죠.

중학생까지는 만화방에서 놀았다면 고등학생, 대학생들은 빵집에서 놀았습니다. 골목마다 빵집이 있을 정도로 인기였다고 하죠. 당시 미국이 밀가루를 원조해 주면서 빵이 대중화됐기 때문입니다. 검정고무신에서 나오는 옥수수 빵 배급받는 장면은 미국이 원조해 준 옥수수 가루로 만든 겁니다.

하지만 정말로 빵집에 빵만 먹으러 가는 건 아니었습니다. 과거 빵집은 다방, 음악 감상실, 분식점까지 합쳐진 다과점 스타일로, 지금의 카페와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 데이트는 빵집에서 했다고 합니다. 요즘도 카페에서 많이 만나는 거 보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모습은 다 비슷한 것 같네요.

마치며

정말 우리나라가 맞는지, 지금 보면 참 신기한 옛날 문화들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아직 소개하지 못한 내용이 많은데요, 이번 영상 반응이 좋으면 2탄을 준비하겠습니다.
이렇게 힘든 시기를 거쳐 현재의 발전된 대한민국이 된 것을 보면, 우리 조상들의 끈기와 노력이 정말 대단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Created by 빠퀴
CC BY 라이선스 | 교정 SENTENCIFY | 에디터 최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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