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치료의 실마리를 KAIST에서 찾다 I KAIST 한진희 교수, 한준호, 서보인 연구원
📌 먼치 POINT
1. 공포 기억의 본질과 새로운 실험 모델
트라우마는 신체적 고통보다 심리적 위협에서 더 자주 발생하며, 이로 인한 공포 기억은 일상에 큰 영향을 준다.
KAIST 연구진은 시각 자극을 이용한 새로운 실험 모델을 통해 고통 없이도 공포 기억이 형성됨을 입증했다.
2. 뇌 회로의 발견과 치료 가능성
PIC-PBN 회로는 심리적 위협에 특화된 공포 기억 형성에 핵심 역할을 하며, 이 회로의 조절을 통해 공포 기억을 유도하거나 억제할 수 있음이 밝혀졌다.
이는 PTSD 등 정신질환 치료의 표적 회로로 활용될 수 있는 과학적 근거를 제시한다.
3. 정밀한 실험 설계와 연구적 의미
반복 실험과 치밀한 조건 검증을 통해 정교한 모델을 완성했고, 이는 데이터 해석의 명료도를 높였다.
이번 연구는 질문을 구체화하고 협업을 통해 과학적 통찰을 얻는 과정의 중요성을 보여주며, 트라우마 치료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들어가며

안녕하세요. 저는 KAIST 생명과학과 교수입니다. 저는 기억 신경생물학 연구실에서 기억과 감정에 대해 연구하고 있으며,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분야 중 하나는 공포기억입니다. 함께 연구를 진행한 한준호 박사와 박사과정생 서보인과 함께 최근 비통각 위협 자극에 대한 공포기억 신경회로 규명 연구를 완료했습니다.
트라우마란 무엇인가: 고대 그리스어에서 현대 심리학까지

트라우마는 상처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인 '트라우마'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원래 신체적인 상처를 의미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심리적인 상처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오늘날 트라우마는 보통 충격적인 사건이나 경험으로 인해 생긴 깊은 심리적 상처를 지칭하는 말로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트라우마는 이처럼 신체적 상처를 넘어 일상 속에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심리적 충격에도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충격적인 사건이나 경험을 하면 그것이 뇌에 강하게 기억으로 저장되고 이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그 사건 당시 느꼈던 내적 공포와 불안을 다시 겪게 됩니다.
공포기억의 생존 가치와 문제점
이렇듯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형성된 기억을 학계에서는 공포기억 혹은 위협 기억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런 기억이 트라우마의 원인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심리적 고통 신호를 처리하는 뇌신경 회로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트라우마라고 부르고 있는 내적 상처에 대해서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자연재해, 사고, 폭력 등 위협적인 상황은 뇌의 공포기억을 남깁니다. 공포기억 뇌 기능은 사실 거의 모든 생명체에 존재하고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본능적 학습 능력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장소에서 생명을 위협하는 무섭고 공포스러운 경험을 하게 되면 그 장소에 다시는 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뇌가 그 경험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공포기억이 없다면 같은 위협 상황에 다시 노출될 가능성이 높고 이는 생존에 매우 불리할 것입니다. 따라서 공포기억은 한 번 형성이 되면 거의 잊혀지지 않고 삶에 지속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트라우마 기억이 과도하거나 왜곡될 경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불안장애, 우울증과 같은 심각한 정신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기존 연구의 한계와 새로운 접근의 필요성

이 때문에 공포기억이 뇌에서 어떻게 형성되고 조절되는지를 이해하는 일은 오랫동안 신경과학의 중심 연구 주제였습니다. 그동안 연구를 통해 고통이 공포기억 형성을 유도하는 중요한 신경 신호라고 알게 됐습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고통을 느끼게 되면 그 경험을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통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고통 하면 떠오르는 육체적 고통과 함께 마음으로 느끼는 심리적 또는 정서적 고통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공포기억 연구는 대부분 생쥐에게 전기 자극을 가하는 방식, 즉 신체적 고통에 기반한 실험에 의존해 왔습니다. 하지만 실제 인간의 공포기억은 신체적 고통보다는 심리적 위협에 의해 형성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일상의 사례로 보는 심리적 위협의 힘
한준호 박사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흥미로운 사례를 제시했습니다. "저는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는데, 이름은 레고입니다. 레고는 오토바이를 무서워하는데, 실제로 부딪힌 경험은 없지만 오토바이가 예전에 빠르게 다가온 경험이 있었고 그 이후로는 레고가 오토바이 소리를 듣거나 혹은 오토바이만 봐도 굉장히 겁에 질린 모습을 관찰할 수가 있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비통각 위협 자극에 의한 공포기억 형성의 한 가지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사고를 실제로 겪지 않더라도 사고가 날 뻔한 경험이나 혹은 자극적인 미디어 노출만으로도 공포기억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결국 PTSD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일상생활에서 인간의 공포기억 형성은 신체적 고통보다는 심리적 위협 자극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대부분의 정신질환 환자들이 신체적 통증 없이 심리적 고통을 호소한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심리적 위협과 공포기억 형성에 특이적인 신경 회로를 규명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연구적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혁신적인 실험 모델 개발: 시각적 위협 자극

저희는 신체적 고통을 직접 경험했을 때의 공포와 심리적 불안으로 겪은 공포의 기억은 뇌에서 어떻게 구분되며 조절될까라는 질문을 바탕으로 심리적 위협을 처리하는 뇌의 회로를 밝히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점은 신체적 고통과 심리적 고통이 거의 항상 함께 오기 때문에 이 둘을 분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심리적 고통이라는 것이 개인의 내적 경험이기 때문에 이를 과학적으로 연구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고, 따라서 심리적 고통이 어떻게 뇌에서 처리가 되는지에 대해서 그동안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저희의 아이디어는 전기 자극이 아닌 시각적 위협 자극을 사용해서 새로운 공포 조건화 실험 모델을 개발하는 것이었습니다.
생쥐는 위에서 빠르게 접근하는 포식자에 대한 본능적으로 공포 반응을 보입니다. 이를 활용해서 천장에서 빠르게 커지는 그림자를 투사하여 생쥐가 마치 포식자에게 공격당하는 듯한 심리적 위협을 경험하도록 했습니다. 이런 시각 자극을 영어로 '루밍(looming)'이라고 하는데 쉽게 생각하면 어떤 물체가 빠르게 다가오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단순한 시각 자극 패턴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자극을 주면 생쥐가 어는 행동(프리징)과 같은 강한 공포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첨단 기술로 뇌 회로 규명하기
이 시각 위협 자극을 이용한 실험을 통해서 물리적인 통증과 자극 없이 심리적인 위협만으로 공포기억이 형성될 수 있음을 입증하였고, 심리적 공포기억 조절에 중요한 뇌신경 회로를 최초로 규명했습니다. 이어서 저희는 새로 개발한 동물 실험 모델을 활용해서 시각적 위협에 대한 공포기억이 형성될 때 어떤 신경 회로가 위협 정보를 전달하는지 규명하고자 했습니다.
화학적 유전학 혹은 광유전학 기술을 활용하면 아주 정밀하게 뉴런의 온오프를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가 있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신경세포의 어떤 약물이나 빛에 반응하는 굉장히 특별한 단백질을 발현시키고 여기에 약물 혹은 빛을 전달하게 되면 인위적으로 뉴런의 활성을 억제시키거나 활성화시킬 수 있는 기술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핵심 발견: PIC-PBN 회로의 역할
저희는 이 화학적 혹은 광유전학적 실험 기법을 활용해서 기존의 신체적 통각 정보를 전달한다고 알려진 외측 팔곁핵(PBN, Parabrachial Nucleus)이라는 영역에서 시각적 위협 학습에서도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심리적 혹은 신체적 고통이 하나의 공통된 뇌 영역에서 수렴할 수 있다는 가설을 제안하는 흥미로운 결과입니다.
이어서 저희는 신체적 고통과는 구별되면서 심리적 위협 정보만을 특이적으로 전달하는 PBN의 상위 영역을 찾고자 했습니다. 통각 자극 같은 경우는 척수를 통해서 올라오게 될 텐데 저희가 한 시각 위협 자극 같은 경우는 척수가 아니라 시각으로 전달이 될 것이고 다른 뇌 영역에서부터 PBN으로 전달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찾기 위해서 PBN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상위 뇌 영역들을 뇌 전반적으로 추적했습니다.
그 결과 혐오감이나 공포와 같은 부정적인 정서 처리에 중요하다고 알려진 후측 대뇌섬피질(PIC, Posterior Insular Cortex) 영역이 PBN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특히 시각적 위협 자극 이후에는 후측 대뇌섬피질 PIC 영역에 있는 신경세포 중 PBN으로 신호를 전달하는 신경세포들이 활성화되며 이 신호가 PBN 신경세포의 활성에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화학 유전학 및 광유전학 기법으로 특정 신경세포뿐만 아니라 뇌 두 영역 사이의 신경회로도 조절할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PIC-PBN 회로를 인위적으로 억제할 경우 시각적 위협에 따른 공포기억 형성이 현저히 감소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선천적인 공포 반응이나 통각 기반의 공포 학습에는 PIC-PBN 회로 억제가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이 회로를 인위적으로 활성화하기만 해도 공포기억이 유도되었습니다. 이러한 결과들은 PIC-PBN 회로가 신체적 고통이 아닌 심리적 위협 정보를 처리하고 학습을 유도하는 핵심 경로임을 보여줍니다.
연구 과정의 도전과 성과

그동안 많은 연구자들이 신체적 고통이 아마도 공포기억 형성을 유도하는 필수 요건이고, 따라서 시각 위협 자극처럼 직접적으로 신체에 고통을 주지 않는 감각 자극은 공포기억을 형성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각 위협 자극에 의해 공포기억이 형성되는 실험 결과를 처음 확인했을 때 저희도 쉽게 믿어지지 않았지만 반복 실험을 통해 같은 결과를 확인하면서 놀랍기도 하고 흥분됐던 기억이 납니다.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호기심을 가지고 확인해 보려고 했던 작은 시도가 결국은 그동안 몰랐던 새로운 발견으로 이어졌던 것 같습니다. 초반에 행동 실험 모델을 개발하고 최적화하는 데 예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연구를 시작하기 전에는 시각 위협 자극에 대한 공포 반응을 검증하고 또 시각 위협 학습 모델을 개발하는 데 한두세 달 정도면 충분하겠다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맨 처음에 생각지도 못했던 굉장히 사소한 실험 조건들까지도 최적화를 진행할 필요가 있었고, 따라서 이 모델을 세팅하는 데만 1년 이상이 걸렸습니다.
최적의 공포 반응을 유도하는 시각 자극의 속도와 크기, 위치 등을 검증하기도 하였고, 또 이 자극을 통해 몇 번 학습을 진행해야 되는지, 그리고 학습을 진행하는 실험 챔버의 사이즈가 어떤지, 또 조명은 얼마나 밝아야 되는지, 쥐 종류에 따른 차이가 있는지 이런 굉장히 사소한 조건들까지도 실험적으로 최적화를 진행하였습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이렇게 꼼꼼히 모델을 확립해 놓았기 때문에 이후 실험들의 데이터 정밀도가 굉장히 높았고 깔끔한 데이터 덕분에 연구적 해석이 명쾌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연구진의 통찰과 경험
사실 많은 분들이 연구 과정이 굉장히 멋진 첨단 장비들을 이용해서 막힘없이 술술 진행할 것이라고 짐작하실 수 있겠지만 사실 연구는 굉장히 지난한 과정들이 많습니다. 특히나 초반에 무언가를 배우고 만들고 또 기초를 다지는 기간이 굉장히 길고 지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탄탄하고 꼼꼼한 기본들이 쌓여야 흔들림 없고 진실된 과학적 사실을 밝히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구는 질문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던진 질문에 답하기 위해 실험을 설계하고 얻은 데이터를 해석하는 과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번 연구에서도 어떻게 검증할 것인가, 결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막막했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 교수님과 박사님께 조언을 구하며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었는데, 특히 '질문의 해상도를 높여라'는 말씀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막막함을 느꼈던 이유는 질문 자체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이를 깨닫고 큰 질문을 여러 개의 세부 질문으로 나눠 단계별로 검증하기 시작했습니다. 덕분에 애매했던 의문들이 풀리며 실험 설계도 훨씬 명확해졌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연구란 혼자 답을 찾는 여정이 아니라 함께 질문을 구체화하고 단계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과정임을 깊이 느꼈습니다.
트라우마 치료의 새로운 가능성
바쁜 현대사에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형태의 스트레스나 트라우마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저희 연구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공황장애, 불안장애 등 정서적 고통을 주 증상으로 하는 정신질환의 발병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맞춤형 치료법을 개발하는 데 중요한 토대를 마련할 것입니다. 특히 신체적 고통 없이 심리적 불안과 공포에 의한 공포기억 형성에 특화된 뇌 회로를 세계 최초로 규명함으로써 이 회로를 타깃으로 한 맞춤형 트라우마 치료법 개발 가능성을 열었다는 데 저희 연구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동물에서의 기초 연구 결과를 실제 사람 환자에게 적용 가능한 치료 기술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아직 해결해야 될 많은 과제들이 남아 있습니다. 앞으로 저희 연구에서는 이 부분들에 집중해서 트라우마를 실질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서 노력할 계획입니다.
Created by KAIST
CC BY 라이선스 | 교정 SENTENCIFY | 에디터 이유진

KA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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