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스 술술과학] 도대체 '무한'이란 무엇인가? ― 인피니티 워 (Infinity War)
📌 먼치 POINT
무한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수학과 인간의 개념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개념이다.
무한은 철학·신학·과학·수학을 관통하며 인간의 인식과 논리를 확장시켜 왔다.
뿐만 아니라, 인류는 세 차례의 ‘인피니티 워’를 거쳤다. 이 논쟁으로 인해 내상을 입기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 논쟁은 무용한 것이 아니었고, 결국 인간 지성의 무한한 가능성을 증명하는 핵심 개념이 되었다.
들어가기 전에
여러분은 무한을 본 적이 있는가?
혹시 수학 시간에 배운 점을 무한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다.
점은 크기가 없다고 배웠을 테니까. 하지만 점이란 수학적 대상일 뿐, 크기가 없는 점을 실제로 볼 수는 없다.
신적 대상을 상상하지 않는 한 무한은 오직 우리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1, 2, 3과 같은 숫자처럼 무한은 실체가 아닌 개념일 뿐일까?
게다가 1, 2, 3등은 이를 연상시키는 대응물이라도 있다지만, 무한은 대체 뭘 보고 연상한 걸까?
무한의 신비
빈센트 반 고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무한을 그리는 중이다."
사실 고흐 이전 15세기부터 화가들은 원근법이라는 방법을 사용해서 부분적으로나마 무한을 화폭에 담아내고 있었다.
20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에셔는 보다 독창적인 방법으로 무한을 표현했다.
지구의 표면을 지도에 그리는 것처럼 휘어 있는 곡면을 평면에 투영한 것이다.
'원형 극한'이라는 그림의 제목이 암시하듯 바깥 테두리 원이 무한을 나타낸다.
하지만 이러한 그림이나 패턴에는 무한이 암시되어 있을 뿐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무한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그럴듯한 방법이 하나 있긴 하다. 거울 사이에 촛불을 두어 거울 속 촛불 이미지가 무한히 반복되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촛불의 이미지가 정말로 무한히 반복되는 걸까?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이 바라보는 순간에도 빛이 거울 사이를 왔다 갔다 해야 한다.
빛이 아무리 빨라도 그 속도가 유한하고 거울 사이가 아무리 가깝더라도 이를 왕복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잠재적 무한이다.
🔢 수학의 세상에서 보는 무한
무한을 볼 순 없지만 느낄 수 있는 세상이 있다. 바로 수학의 세상이다.
1, 2, 3, 4, 5... 이러한 자연수 수열에서 우리는 무한을 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느낄 수는 있다.
우리는 어느 순간 아무리 큰 수 n을 생각해도 그보다 큰 수 n+1이 있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이렇게 n, n+1 아이디어를 적용하면 무한의 개념을 아주 손쉽게 우리의 세계로 끌어들일 수 있다.
무한히 늘어서 있는 도미노를 모두 쓰러뜨린다고 상상해 보자.
하나씩 차례로 모든 것을 쓰러뜨린다고 생각하면 우리의 상상은 끝날 수 없다.
유한한 시간에 무한한 도미노를 모두 쓰러뜨리려면 수학적 귀납법이라 불리는 기막힌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먼저 첫 번째 조각을 쓰러뜨린다.
그리고 임의의 n번째 조각이 그다음 n+1번째 조각을 틀림없이 쓰러뜨리는 것을 확인한다.
그럼, 끝.
다시 예를 들어보자.
앞서 자연수 수열의 합을 모두 더하면 1+2+3+...+n = n(n+1)/2이다. 이를 도미노 방법을 이용해서 증명해 보자.
먼저 n=1일 때 성립함을 증명한다.
n=k일 때 성립한다고 가정한다.
n=k+1일 때도 성립함을 증명한다.
그럼, 끝.
우리는 이 공식이 모든 자연수에 대해 성립함을 보인 것이다.
무한개의 자연수 도미노를 순식간에 모두 쓰러뜨린 셈인데, 이것이 수학적 귀납법의 힘이다.
무한을 느낄 수 있는 또 한 가지 수학적 트릭에는 귀류법이라는 게 있다.
√2를 예로 들어보자.
√2가 무리수라는 걸 직접적으로 증명하는 건 불가능하다.
√2가 무리수라는 것은 이를 두 정수의 비로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직접적으로 증명하려면 √2가 순환하지 않는 무한소수임을 증명해야 한다.
즉, √2를 계산해서 실제로 다 써봐야 한다.
과거에도 인간은 다양하고 기발한 방법으로 √2를 계산했지만 이제는 컴퓨터를 사용해서 보다 빠르게 √2를 계산할 수 있다.
하지만 소수점 이하의 많은 자릿수를 계산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순환하지 않는 무한소수라는 걸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2가 무리수임을 직접 보이지 않고 거꾸로 √2가 유리수라면 하고 가정한다.
그리고 그것이 오류라는 것을 보임으로써 √2가 유리수가 아님을 증명한다.
무리수는 무리수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무엇이 아닌지를 통해서 정의되는 셈이다.
귀류법 자체가 이미 무한을 우회하는 방법이지만, 이 방법을 이용해서 다른 무한을 증명할 수도 있다.
무한을 에둘러서 무한을 증명하는 이러한 방법들은 수학의 놀라운 힘을 느끼게 한다.
⚛️ 물리학에서 무한
하지만 물리의 세계에서는 얘기가 다르다.
많은 물리학자들은 물리적 무한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물리의 세계에서 무한은 두 방향을 향한다.
무한히 작은 것과 무한히 큰 것, 즉 무한소와 무한대다.
사물은 무한히 쪼갤 수 없다. 즉 무한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과학은 길이도 시간도 그 최솟값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무한히 큰 것, 즉 우주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우주가 유한한지 무한한지는 아직 그 어느 누구도 자신 있게 얘기하지 못한다.
대표적인 예가 최초의 빅뱅 또는 블랙홀에서의 특이점이다.
특이점이란 말은 계산상에 무한이 등장했다는 얘기인데, 빅뱅이나 블랙홀 모두 무한의 밀도를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한한 밀도 때문에 생긴 시간과 공간의 극단적인 굴곡이 시공에 구멍을 뚫은 것과 비슷한 걸로 상상할 수 있다.
이게 얼마나 당혹스러운지 앞서 언급한 펜로즈라는 수학자는 우주 검열 가설을 제안했다.
블랙홀 내부의 특이점을 외부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다는 가설이다.
영국의 물리학자 존 베로는 《무한으로 가는 안내서》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한은 존재에 관한 결정적인 문제가 발생할 때만 무대에 등장하는 아주 중요한 배우다.
무한의 문제는 당신이 진리를 향해 가는 도중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경고장이다."
이처럼 물리적 무한은 자연법칙에 대해 보다 더 정확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신호다.
한때 끈이론이 그토록 열렬하게 환영받은 까닭은 이전의 이론들과 달리 무한의 문제를 멋지게 우회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한은 문제일까? 아니면 해답일까?
세 차례의 인피니티 워
역사 이래로 수많은 석학들과 천재들이 무한의 논쟁에 휘말렸고, 이로 인해 내상을 입거나 심지어 죽음에 이른 사람도 있었다.
무한을 둘러싼 수많은 토론과 논쟁은 그렇다 쳐도 남의 안 듣거나 제멋대로 해석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이름하여 인피니티 워.
인류 역사에는 세 차례 중요한 인피니티 워가 있었다.
🏛️ 1차, 고대 그리스의 철학적 대논쟁
기원전 5세기경, 고대 그리스인들은 처음으로 '무한'에 대해 체계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했다.
당시 학문의 중심지였던 아테네 학당에서 피타고라스는 주장한다.
'"만물은 수다"라는 강령 아래 모든 수는 정수의 비율로 표현 가능하다고 말이다.
그러나 히파소스는 직각삼각형의 빗변이 정수의 비율로 표현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무리수, 즉 무한 소수의 존재를 주장한다.
그 대화가 채 끝나기도 전에 철학자 제논이 등장해 무한의 실재성을 주장한다.
그는 무한을 가정할 경우,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결코 따라잡지 못하고, 화살은 날아가지 못한다는 역설을 제시한다.
이에 헤라클레이토스는 무한은 착각이며 오히려 변화와 운동이 본질이라고 반박한다.
이 논쟁에 제논의 스승 파르메니데스도 개입해 현실보다 개념이 우선이라는 입장을 밝힌다.
플라톤은 이 논의에 "현실보다 개념이 우선"이라고 선언하며, 이를 '이데아'라고 부른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데아가 무엇이며, 사유의 옳고 그름을 누가 판단하는지 되묻는다.
제논은 무한 개념이 존재자 속성의 반영이라 주장한다.
이에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하지 않는 존재라는 사고 자체가 착시이며 모든 것은 변한다고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논쟁을 정리하며 무한을 '가무한'(개념 속 무한)과 '실무한'(현실 속 무한)으로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현실에서는 실무한이 존재하지 않으며, 무한히 쪼개지는 물질은 관찰할 수 없기에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이에 여성 수학자 히파티아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모순을 지적하며 시간의 무한성에 대해 질문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은 개념이므로 실무한이 아니라고 답한다.
마지막으로 수학자 아르키메데스가 등장해 플라톤의 제자인 에우독소스의 소진법을 언급한다.
이는 무한히 원에 근접하는 정다각형을 통해 원의 면적을 구하는 방식으로, 극한 개념의 기원이 된다.
아르키메데스는 이를 통해 무리수 역시 수로 인정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의는 훗날 뉴턴과 라이프니츠에 의해 미적분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논쟁은 수학을 독립적인 학문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16세기 라파엘로는 이 장면들을 그림으로 남겨 후세에 전했다.
♾️ 2차, 중세의 신학적 무한론
유럽의 중세는 신의 시대였고, 무한에 대한 논쟁도 곧 신에 대한 사변으로 이어졌다.
무한은 천공을 향해 비상하려 했으나 눈부신 신의 광휘에 가려 덧없이 소실되고 말았다.
신에 대한 관심이 지나쳐 무한에 대한 논쟁은 지극히 주변적이고 파편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4세기의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앎조차도 무한한 사물들을 아우를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한 답변』에 반박한다.
"인간에게 무한한 것이 신에게는 유한하다. 마찬가지로 신은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할 수 있다."
7세기 인도의 수학자 브라마구타는 영을 정의하면서 영은 무한 분의 1이고, 따라서 무한은 영 분의 1이라고 했다.
이때 무한 = 1/0이라는 식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창조관과도 대응된다.
무한은 신을, 영은 무를, 1은 존재를 상징한다고 하면 이 식은 이렇게 해석된다.
"존재는 무한의 힘을 빌려 무로부터 탄생한다."
11세기 이탈리아의 철학자 안셀무스는 신의 존재를 존재론적으로 증명하며, 무한 또는 완전함은 신의 속성이라 주장한다.
이에 대해 15세기 독일의 철학자 쿠자누스는 이성과 진리의 관계를 다각형과 원의 관계에 비유했다.
더불어 인간은 진리에 다가갈 수는 있어도 도달할 수 없다고 반박한다.
이 논의는 데카르트와 파스칼에게로 이어진다.
데카르트는 "무한의 존재는 알 수 있어도 본성은 알 수 없다"며 논쟁의 무익함을 주장했다.
파스칼은 "수학적 무한은 의미 있으며 유한한 경험을 바탕으로 무한한 신을 유추할 수 있다"고 맞섰다.
중세 시대의 무한은 철저히 신의 영역이었으며, 이 주제가 지상으로 다시 내려오려면 19세기 수학의 발전을 기다려야 했다.
⚔️ 3차, 19세기 수학자들의 치열한 대립
19세기 중후반, 수학은 실무한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국면에 진입한다.
베를린 대학을 중심으로 칸토어와 크로네커의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다.
크로네커는 "신은 정수를 창조했고, 나머지는 인간의 작품이다"라며 무한 자체를 부정하고, 무리수마저 거부한다.
칸토어는 이에 맞서 "무한도 엄밀한 논증을 거치면 수학적으로 수용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초한수와 연속체 가설을 내놓는다.
칸토어는 초한수를 수학적으로 정립하고자 했으나, 연속체 가설은 끝내 해결하지 못한다.
그의 이론은 푸앵카레 등 동시대 수학자들의 반발을 샀고, 결국 칸토어는 조울증에 시달리며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 논쟁은 괴델에 의해 이어진다.
그는 칸토어의 영향을 받아 불완전성 정리를 발표하고, 연속체 가설이 증명 불가능하다는 것을 밝혀낸다.
동시에 그는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신 증명을 수학적으로 정립하고자 했으나, 실패한다.
그는 극단적 피해망상에 시달리다 굶어 죽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마무리하며
우리에게 무한은 문제일까, 아니면 해답일까?
아마도 무한은 문제이면서 동시에 해답일 것이다.
무한을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인간 지성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Created by 카오스 사이언스 @KAOSscience
CC BY 라이선스 / 교정 SENTENCIFY / 편집자 최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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