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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 생애와 업적 10분 요약

지식트리2025.04.29
목차 📚

📌 먼치 POINT

레오나르도 다빈치15세기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예술가이자 과학자입니다.「모나리자」, 「최후의 만찬」같은 명화를 제작했으며, 발명품 설계해부학 연구에도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사생아로 태어나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피렌체의 거장 베로키오 밑에서 수련을 받았습니다. 밀라노 궁정에서 활동하며 군사 장비와 건축 설계에도 참여했습니다. 말년에는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에서 지냈으며, 67세에 생을 마쳤습니다. 그는 예술과 과학을 넘나드는 르네상스형 인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들어가기 전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미술, 과학, 건축, 해부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천재성을 발휘한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뛰어난 외모와 목소리, 탁월한 신체 조건까지 갖춘 인물이기도 합니다. '다빈치'라는 이름은 그가 태어난 빈치 마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혼인 외 관계에서 태어난 사생아였지만, 이번 글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주요 작품과 업적, 그리고 그의 삶을 간결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다빈치의 탄생과 어린 시절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452년 이탈리아 피렌체 공화국 토스카나의 빈치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다빈치'라는 이름은 그가 빈치 마을 출신이라는 의미로, 그의 본명'레오나르도 디세르 피에로 다빈치'였습니다. 다빈치의 아버지는 변호사였고 어머니는 농민이었는데, 두 사람은 결혼하지 않은 사이였습니다.
사생아로 태어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당시 이탈리아 사회에서 신분상의 활동 제약이 있었습니다. 그나마 이탈리아는 다른 나라들보다 사생아에 대한 대우가 좋은 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나 약사가 될 수 없었으며 대학 진학도 불가능했습니다. 어린 시절 다빈치는 어머니와 살다가 대여섯 살이 되면서 아버지의 집으로 옮겨갔습니다. 약 10년 후, 아버지는 레오나르도의 뛰어난 예술적 소질을 발견했습니다. 변호사였던 아버지는 레오나르도가 합법적인 아들이었다면 공부를 시켰을지 모르지만, 대학 진학이 불가능했기에 그를 피렌체로 보내 예술을 배우게 하였습니다.




베로키오 공방에서의 수업과 성장

피렌체에 도착한 레오나르도는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라는 유명 화가의 공방에 견습생으로 들어갔습니다. 베로키오는 피렌체를 대표하는 도나텔로의 가장 우수한 제자로, 도나텔로 사후에는 그의 후계자로서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는 미술가가 되었습니다. 피렌체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메디치 가문후원을 받는다는 것은 당대 최고의 실력을 가진 미술가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10대 중반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다른 견습생들처럼 청소와 잔심부름 등을 하며 미술을 배워나갔습니다. 붓을 닦고 안료를 빻는 등의 기본적인 일을 하면서 그림 실력을 키워나갔습니다. 공방 생활을 하는 동안 스승인 베로키오 외에도 보티첼리를 비롯한 여러 예술가들의 작품을 접하면서 점점 능력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20살이 되던 해, 레오나르도는 베로키오의 「그리스도의 세례」라는 작품에서 스승과 함께 작업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 작업에서 젊은 레오나르도가 맡은 부분은 많지 않았지만, 그는 왼쪽 귀퉁이에 있는 두 명의 천사를 그려넣었습니다. 베로키오가 레오나르도의 뛰어난 솜씨에 충격을 받고 더 이상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고 베로키오는 계속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화가로서의 첫 걸음과 특이한 작업 습관

「그리스도의 세례」를 완성한 후,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정식으로 화가 길드인 성 루카 조합가입시켰습니다. 실력을 인정받은 레오나르도는 이제 정식으로 자신의 공방을 운영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당대 최고의 미술가인 베로키오를 뛰어넘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최고 수준의 그림 실력을 갖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결점이 있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자신이 맡은 작품을 진행하다 중간에 그만두는 일이 굉장히 잦았습니다. 막상 최고의 실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본인의 작품 활동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하던 작업을 쉽게 중단했습니다. 레오나르도의 뛰어난 실력은 빠르게 소문이 났고, 1478년에는 큰 프로젝트를 단독으로 맡았지만 밑그림만 그리고 작업을 중단했습니다. 1481년에 주문받은 재단화인 「동방박사의 경배」도 완성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일을 시작하고 마무리하지 않는 습관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고, 이로 인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완성작 20점이 넘지 않게 되었습니다.




밀라노에서의 전성기와 '최후의 만찬'

1482년, 30살이 된 레오나르도 다빈치밀라노 공국으로 건너가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밀라노 공국은 레오나르도와 동갑인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통치하고 있었으며, 그는 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했습니다. 스포르차 후원을 받은 레오나르도「암굴의 성모」, 「바위 위의 성모」 등의 작품을 만들었으며, 이 시기에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최후의 만찬」이 탄생했습니다.
「최후의 만찬」은 현재 훼손이 심한 상태인데, 이는 레오나르도가 프레스코 기법이 아닌 템페라 기법으로 그렸기 때문입니다. 프레스코 기법은 벽이 마르기 전에 그림을 완성해야 하는데, 완벽주의 성향이 강했던 레오나르도는 수정이 어려운 프레스코 기법을 선호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사용한 템페라 기법은 달걀이나 무화과 나무의 수액 등을 용매로 사용해 색채 가루인 안료와 섞어 물감을 만드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법은 시간이 지나면서 벽화 바닥이 들뜨고 곰팡이가 생기는 부작용을 일으켰습니다. 「최후의 만찬」의 상태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악화되어 1977년 복원 전에는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결국 그림은 22년에 걸쳐 복원되었지만, 원본에 없는 색을 덧칠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벽화는 가로 880cm, 세로 460cm의 거대한 크기로, 현재 밀라노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다재다능한 천재의 다양한 연구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밀라노에서 스포르차 공작전속 화가이자 군사 기술자, 건축가로 일하며 17년 동안 머물렀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미술뿐만 아니라 해부학, 천문학, 식물학,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갔습니다. 당시 권위 있는 많은 학자들보다 더 많은 책을 소장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1499년, 제2차 이탈리아 전쟁이 발발하면서 프랑스 왕국의 루이 12세가 밀라노를 점령했고, 레오나르도의 후원자였던 루도비코 스포르차포로가 되어 프랑스 투렌의 로슈 성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스포르차는 8년 후 그곳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후 레오나르도는 잠시 베네치아로 떠났다가 1500년에 다시 피렌체로 돌아왔습니다. 1501년  「성모자와 성안나」 재단화를 시작으로 수많은 연구 스케치와 관찰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의 스케치에는 당시 세상에 없던 비행기나 헬리콥터 같은 상상의 기계와 사람 및 동물에 대한 정교한 해부도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화가는 해부학에 무지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던 레오나르도는 30구가 넘는 남녀 시체해부했습니다. 방부제가 없던 시절, 썩어가는 냄새를 참아가며 인체 내부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스케치로 남겼습니다.





후기 작품과 모나리자의 탄생

1503년, 레오나르도는 피렌체 시청 벽화 작업을 의뢰받아 「앙기아리 전투」를 시작했습니다. 이는 미완성으로 남았지만 루벤스의 모사본이 전해집니다. 같은 시기, 옆 벽에서는 28세 미켈란젤로가 「카시나 전투」를 작업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상반된 분위기의 작품으로 세대 교체를 알렸습니다. 두 작품 모두 완성되지 못했지만, 1512년까지 전시되어 많은 젊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1506년, 레오나르도는 루이 12세의 요청으로 밀라노에 돌아갔으나, 전쟁으로 프랑스군이 철수하자 로마로 옮겨 교황청 관련 작업을 맡았습니다. 1516년에는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아 프랑스 클로 뤼세 성으로 이주해 「모나리자」 작업에 전념하며 만년을 보냈습니다.「모나리자」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품 중 하나로,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경제적 가치는 약 40조 원에 달하며, 루브르 방문객의 85%가 이 작품을 보기 위해 찾습니다.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예술과 과학, 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류 문화유산에 큰 족적을 남긴 르네상스 시대거장이었습니다. 그의 창의성과 탐구 정신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마무리하며

오늘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한 정리를 해보았습니다. 그는 이 짧은 영상으로 담기에 턱없이 부족할 만큼 그림, 건축, 과학, 의학 등 다방면에 걸쳐 인류사에 큰 업적을 남긴 팔방미인형 천재라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드리며,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Created by 지식트리 @G_seektree  
CC BY 라이선스 / 교정 by SENTENCIFY  / 편집자 최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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