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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봉 역사 10분 완벽정리

지식트리2025.04.17
목차 📚

📌 먼치 POINT

가봉아프리카 중서부 위치한 나라로, 1960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했습니다. 독립 이전에는 포르투갈과 프랑스 등의 식민 지배를 받았으며, 19세기 중반 리브르빌이 해방 노예의 정착지로 세워졌습니다. 독립 후 레온 음바 초대 대통령과 함께 일당제가 도입되었고, 이후 1967년부터 2009년까지 오마르 봉고장기 집권했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국가는 상대적으로 안정되었지만 빈부격차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사망 이후 아들 알리 봉고가 권력을 이어받아 계속 통치하고 있으며, 2022년 가봉은 영연방에 가입했습니다. 식민지 시대부터 현대까지 가봉은 독재와 개혁을 반복하며 오늘날의 모습을 형성해 왔습니다.


1. 소개

가봉은 아프리카 중서부에 위치한 국가로 수도는 자유의 도시라는 의미를 지닌 리브르빌입니다. 가봉의 국기는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기 전인 1959년 채택 당시에는 왼쪽 상단에 프랑스 삼색기가 있었으나 1960년 8월 현재의 모습으로 변경하여 1961년 공식 제정되었습니다.

가봉의 기본 정보

상단의 초록색아프리카 밀림을, 노란색태양적도를, 파란색바다를 상징하며, 일설에는 가봉의 국기 디자인은 슈바이처가 기록한 저서의 광경을 그대로 형상화한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슈바이처는 가봉의 식민지 시절인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에 병원을 세우고 의료 봉사를 하면서 오고우에강의 물소리와 밀림의 침묵 등 아프리카 생활의 회상을 담은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를 집필했습니다.
가봉아프리카 서부 적도 아래 남대서양에 접해 있는 국가로, 북쪽적도기니, 카메룬, 동쪽으로는 콩고국경을 접하고 있습니다. 가봉의 국토 면적은 약 27만 제곱킬로미터로 이는 대한민국의 2.7배 정도의 크기입니다. 2021년 기준 약 22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이는 인구 수 세계 145위로 충청남도의 인구 수와 비슷한 수치입니다.
가봉의 1년 총 GDP는 2021년 기준 약 180억 달러로 세계 120위권이지만 1인당 GDP는 약 8500달러로 세계 80위권 내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봉은 공용으로 프랑스어를 사용하며, 종족 구성은 반틈 부족 및 아프리카인과 유럽인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봉의 종교는 50% 이상의 인구가 기독교를 믿고 있으며, 그 외에 정녕 신앙이나 이슬람교를 믿고 있습니다.


2. 역사(프랑스 식민지 전후)

1472년 포르투갈의 항해가가 강 하구를 발견하였는데 그 모습이 후드가 달린 망토의 모습과 비슷하다하여 포르투갈어, ‘가방’에서 따와 이 지역을 가봉이라고 불렀습니다. 가봉의 역사는 유럽의 접촉 이전까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14세기 초에 반투족 이민자들이 이 지역에 정착했고, 15세기 후반에는 포르투갈 탐험자들과 무역상들이 도착했습니다. 토착민이었던 피그미 부족들은 황족과 같이 약 서기 천년부터 북쪽에서 이주한 반투 부족민들에 의해 대부분 쫓겨났습니다.
유럽이 접촉하기 전 부족 생활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부족의 예술은 풍부한 문화유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봉에서 최초로 확인된 유럽인들은 15세기 후반에 도착한 포르투갈 탐험자들과 무역상들이었으며, 이 시기에 남부 해안은 로앙고 왕국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보호령 체결에서부터 독립까지

포르투갈인들연안 섬들인 상투에 프린시페, 페르난도 포에 정착하면서 상투의 섬의 기지를 두고 상하와 흑단을 사기 위해 자주 가봉 연안에 내항하였습니다. 16세기에는 더 많은 유럽 상인들이 노예, 상하, 열대나무 무역을 위해 지역을 찾아왔으며, 17세기부터는 네덜란드와 영국, 프랑스의 항해가들도 내항하여 노예 무역이 성행하였습니다. 1838년과 1841년 사이에 프랑스인 선장이 가봉의 해안 남쪽의 추장과 노예 무역 폐지 협정을 맺었고, 그 후 다시 조약을 체결하여 보호령을 만들었습니다.
1842년 뉴잉글랜드에서 온 아메리카 선교단들로 인해 그리스도교의 포교 활동해방 노예의 정착지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1849년 프랑스 당국은 불법 노예선을 포획하여 타고 있던 노예들을 풀어주면서 구축된 요새를 중심으로 정착지 및 자유의 도시인 리브르빌이 만들어졌습니다. 19세기 후반 동안 프랑스 탐험가들은 가봉의 울창한 정글을 통과하는 오고우에강 유역 탐험을 진행했는데, 가장 유명한 탐험가인 피에르 사보르냥 드 브라짜는 가봉 운반인과 가이드들을 동반하여 오고우에강 상류에 프랑스빌을 건설하였습니다.
1885년 프랑스는 가봉을 점령했지만 1903년까지 관리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1910년 가봉 지역은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의 4개 영토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후 가봉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서 1960년이 되어서야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이루었습니다.


3. 역사(독립과 독재)

1960년 가봉이 독립했을 때 존재한 2개의 정당으로는 레온 음바가 이끌던 가봉 민주 블록과 장 일레르 오바마가 이끌던 가봉 민주 사회주의 동맹이 있었습니다. 독립 이후 의회제에 따라 열린 첫 번째 선거에서 어떤 정당도 다수당이 되지 못했지만 BDG는 4개의 독립적인 입법 의원 중 3명에게서 지지를 얻으며 음바가 수상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가봉이 양당 체제를 유지하기에는 인원이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린 직후 양당 지도자들은 일당제로 단일 후보자를 내세우는 것에 합의했고, 새로운 대통령제에 따라 열린 1961년 2월 선거에서 음바대통령, 오바마외무부 장관이 되었습니다. 이 일당 체제는 1963년 2월까지는 효과가 있었던 것처럼 보였지만 더 많은 BDG 일파가 UDSG 당원들에게 당의 통합과 사임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결국 UDSG 각료들은 사임했고, 음바는 1964년 2월 선거를 위해 국회의원 수를 67명에서 47명으로 줄였으며, UDSG는 선거 법령의 요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후보자들을 소집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이렇게 BDG가 어부지리로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자 1964년 2월 18일 가본 군대가 무혈 쿠데타로 은발을 실각시켰고, 다음 날 프랑스 군대가 음바의 정부를 다시 수립했습니다. 1967년 레온 음바오마르 봉고가 각각 대통령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BDG는 국회에서 전체 47석을 모두 차지했습니다. 당시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이 임기 중 사망하는 경우 부통령이 자동 승계가 가능해졌는데, 대통령 선출 같은 해 말 음바사망하면서 오마르 봉고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가봉의 민주당 설립

1968년 3월 봉건은 BDG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당인 가봉 민주당을 설립하면서 가봉을 일당제 국가로 선포했습니다. 그는 이전의 정치적 소속과 상관없이 모든 가봉인에게 참여를 권유하였으며, 1973년 2월에 유일한 대통령 후보로 나서 99.56%의 지지율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1975년 4월 가홍의 부통령직은 폐지되었으며 자동 승계에 대한 권리가 없는 수상으로 대체되었습니다. 봉고는 1979년 11월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재선출되었으며, 7년 임기에 따라 1986년 11월 선거에서 다시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봉고는 PDG를 과거 가봉 정치를 분열시켰던 지역 및 부족의 경쟁자들을 잠식하는 도구로 사용하여 정부의 개발 정책을 지지하는 단일 민족 운동을 일으키려고 했습니다.


4. 역사(다당제 민주주의)

1990년대 초, 경제에 대한 불만과 정치적 자유화를 향한 열망은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격렬한 시위파업을 촉발했습니다. 봉고는 노동자들의 불만에 대한 대응으로 상당한 임금 인상을 양보 및 부문별로 협상에 임했고, 1990년 3월부터 4월까지 가봉의 미래 정치 체제를 논의하기 위해 PDG를 개방하며 국가 정치회의를 조직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PDG와 74개의 정치 단체가 이 회의에 참석했는데, 참여자들은 기본적으로 두 개의 큰 연합으로 집권 여당인 PDG와 그 동맹들 반대쪽에는 이탈했던 모레나 펀더멘탈과 가봉 진보당으로 구성된 야당 연합 정당 통일전선으로 나누어졌습니다.
1990년 4월 회의는 상원의 창설, 예산 편성의 분권화 집회와 언론의 자유 출국, 비자 요건의 철회를 포함한 전면적인 정치 개혁을 승인했습니다. 이는 다당제 민주주의로 정치 체제의 변혁을 인도하기 위한 시도로 봉고는 PDG 의장을 사임했으며, 새로운 수상인 카시미르 오예음바를 앞세운 과도 정부를 수립했습니다. 이에 따라 소집된 가봉 사회민주주의 연합은 여러 야당 대표들을 내각에 포함시켰고, 1990년 5월에 기본 권리 장정과 독립적 사법권을 부여했지만 대통령의 강력한 행정 권한을 유지한 잠정 헌법 초안을 수립했습니다. 그해 9월 독립 후 약 30년 만에 처음으로 다당제 총선이 열렸는데, 기존 여당인 PDG가 다수당이 되면서 오마르 봉고의 시대는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5. 역사(근대)

1993년 오마르 봉고가 51%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하자 야당 후보자들은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고, 심각한 시민 소요는 정부와 야당들 사이에서 정치적 타결을 향해 노력하자고 합의했습니다. 회담은 1994년 11월 파리 협정으로 이어지고, 이 협정에 따라 몇몇 야당 인사들이 국민통합 정부에 포함되며, 1995년 국민투표에서 헌법 개혁이 승인되었지만 협정은 곧 결렬되었습니다. 이후 PDG는 의회 선거에서 압승을 거뒀지만 1997년 지방선거에서 리브르빌을 포함한 몇몇 주요 도시들이 야당 시장을 선출하게 됩니다.

오마르 봉고의 시대, 그 이후의 평가

1998년 오마르 봉고는 또다시 재선에 성공하면서 봉고의 주요 경쟁 후보들은 선거 결과가 날조된 것이라고 반박했지만, 국제 선거 감시관들은 선거에 심각한 행정적 문제들이 있어도 이러한 선거 결과가 여론을 대표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가봉의 독재자로 알려진 오마르 봉고는 부족이나 정파 간 내전이 끊이지 않는 다른 아프리카 나라에 비해 상당히 안정적으로 나라를 이끌며 원유와 삼림 개발을 통해 국부를 축적하여 아프리카에서 잘 사는 나라가 된 점에 대해서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랜 장기 집권부의 재분배 실패로 빈곤율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나쁜 평가도 받고 있습니다.

오마르 봉고의 사망 이후, 그의 아들이 대통령이 되다

1967년부터 2009년까지 42년간 대통령을 역임한 오마르 봉고는 2009년 6월 8일에 스페인 병원에서 사망하였으며, 그의 아들 알리 봉고 온딤바가 2009년 8월에 열린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알리봉고 온딤바 또한 아버지에 이어 계속해서 대통령에 선출되고 있으며, 2019년 가봉의 군사들이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2021년 5월 영연방 대표단이 가봉을 방문하였고, 봉고 대통령은 가봉은 기꺼이 영연방에 가입할 의사가 있다고 밝히며 2022년 6월 25일 영연방 가입하였습니다.


마무리하며

오늘은 세계백과 코너 가봉 1 역사 파트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럼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드리며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Created by 지식트리 @G_seektree  
CC BY 라이선스 / 교정 by SENTENCIFY / 편집자 최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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