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브 해 역사 3 : 노예 반란과 설탕 식민지
📌 먼치 POINT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 열강들이 카리브 지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시작된 노예제도의 역사와 그로 인한 사회적·경제적 구조를 다룹니다. 아프리카 노예들의 강제 이주, 가족 해체, 저항과 봉기, 각국의 식민 통치 방식, 설탕 산업의 성장과 노동 착취, 그리고 이후 등장한 계약 노동 체제까지—카리브 지역에서 벌어진 식민과 저항, 착취의 역사를 폭넓게 조망하며 그 여파가 오늘날까지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보여줍니다.
들어가기 전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활동이 잇따라 세월이 흘러 영국과 프랑스 같은 강대국들 또한 카리브 해의 영향력을 다지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수백만 명 이상의 노예들을 데려오게 됩니다.
이번은 카리브 해 역사 세 번째 시간으로 카리브 해 노예들의 반란과 식민지에 대한 내용들을 다뤄보겠습니다.
1. 아프리카인들의 노예화
유럽 열강과 노예 무역의 시작
카리브 해 연안의 아메리카 농장주들의 관점은 아프리카에서 데려온 노예들이 서로 사랑하거나 지속적으로 유대 되는 관계를 부인했기 때문에 매매를 통해 가족의 무차별적 분리를 하는 것에 대해 당연한 절차라 여기며 합리화했습니다. 노예제의 초기 시절부터 무차별적 매매로 인한 아프리카인들의 생이별은 노예들의 가정 생활을 심각하게 훼손시켰고,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 부부마저도 별도로 매매되는 방식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노예 부부들은 간혹 매매로 인해 헤어지기도 했습니다.
노예제와 가족의 파괴
매매로 인한 노예 가족들의 이별로 이어지는 행위들이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게 되면서, 노예제 후반기에는 이를 막기 위해 가족들은 함께 매매되거나 가능한 가까운 이웃에 두는 것에 대한 법안들이 통과되었지만, 이러한 법들은 빈번하게 무시되기 일쑤였습니다. 가족들과 헤어져 두 번 다시 볼 없이 멀리 떨어지게 된 노예들은 절망하거나 완전히 낙담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으며, 자유 시간이 주어진 노예들은 낮에 일을 마치고 밤 시간을 이용하여 가족과 만나기 위해 먼 거리를 왕복하여 가끔씩 재회하기도 했는데, 점차 시간이 흐르며 카리브 해 지역의 노예 농장들이 쇠퇴함에 따라 노예 매매로 인한 가족의 이별 수가 감소하게 되었습니다.
유럽 농장들은 농장 시스템과 농장에서 일하도록 수립된 많은 노예를 규제할 법을 만들어 나갔는데, 이러한 법적 통제들로 인해 카리브 해의 지역에서 노예들의 수가 유럽인 주인들보다 더 많아졌고, 자메이카처럼 저항이 지속되었던 식민지에서 거주하는 노예들에게 가장 억압적이었습니다. 초기 식민지 시대 동안 저항적 노예들은 고문에 따른 죽음을 포함하여 판결에 따라 가혹한 처벌을 받았으며, 폭행, 절도 혹은 지속적 탈출 시도 같은 경범죄들은 손이나 발을 자르는 등의 신체를 훼손하는 벌을 받았습니다.
식민지별 법과 노예의 권리
영국 통치 하에서 노예들은 오직 주인의 동의에 따라 자유를 얻을 수 있었으며, 따라서 노예들이 자유를 얻는 경우는 드물었고, 영국 식민지들은 자체 법, 그리고 현지 섬 총독과 영국 국왕의 승인을 통해 법들을 제정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 법은 노예를 재산으로 간주했으며, 이에 따라 노예들 사이의 혼인, 가족 권리, 노예들의 교육 혹은 휴일과 같은 종교 관례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영국 법은 배심 재판에 대한 권리를 제외하고 자유를 얻은 노예들에 대해 모든 권리를 부인하였으며, 자유를 얻은 노예들은 재산을 소유하거나
투표하거나 직책을 맡을 권리를 갖지 못했으며, 심지어 직업에 종사할 권리마저 갖지 못했습니다.
프랑스 제국은 제국 전체에 걸쳐 효력을 가졌던 코드 누아르에 따라 노예들을 규제했지만, 이러한 코드 누아르는 카리브 해의 식민지들에서 프랑스의 관행들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프랑스법은 노예들 간의 혼인을 인정했지만 주인의 동의를 얻은 경우에만 인정하였고, 스페인 법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법은 유럽인 남성과 흑인 혹은 크리올 여성 사이의 혼인을 법적으로 인정했습니다.
프랑스와 스페인 법들은 노예 해방 혹은 노예가 자유를 구매해서 자유인이 되는 능력을 인정하는 데 있어 영국 법보다 더 관대했는데, 프랑스 법에 따라 해방 노예들은 완전한 시민권을 얻었습니다. 프랑스는 또한 자기 재산을 소유할 권리와 계약을 체결할 권리처럼 노예들에 대한 제한적 법적 권리들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2. 노예 봉기
저항과 말룬 공동체의 형성
농장 시스템과 농장의 성장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노예 무역은 식민지 시대 전체에 걸쳐 많은 카리브 섬들에서 잦은 노예 저항을 초래했습니다. 저항의 형태는 우선적으로 농장에서 완전히 탈출하여 유럽 정착지에서 벗어난 지역의 도피처를 찾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마룬으로 알려진 도망 노예들의 공동체들은 대앤틸리스 제도의 깊은 산림과 산악 지역,
소앤틸리스 제도의 섬들에서 단결했습니다. 농장과 유럽인 정착지들의 확산으로 인해 종종 여러 마룬 공동체들이 종말을 맞이하기도 했지만, 이들은 세인트 빈센트와 도미니카, 그리고 자메이카, 히스파니올라, 과들루프, 쿠바 등지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더 큰 규모의 카리브 섬들에서 주기적으로 격렬한 저항이 발발하였으나 때로는 반란을 일으키고자 했던 많은 모의들이 실현되기도 전에 유럽인들에 의해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자메이카와 쿠바를 중심으로 터진 격렬한 봉기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에서든 수십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노예들을 수반한 격렬한 봉기들은 주기적으로 일어났고, 특히 자메이카와 쿠바에서 많은 노예 봉기들이 일어났는데
여러 봉기들이 유럽 군대에 의해 잔인하게 토벌되기도 했습니다. 카리브 해 지역에서 실제로 격렬한 봉기로 이어졌던 노예 봉기들은 주로 17, 18세기에 이루어졌는데, 쿠바와 자메이카에서는 10여 차례, 도미니카와 마르티니크, 토르톨라에서는 5회 정도, 그 외 수십 여 지역에서 한 차례 이상의 격렬한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사탕수수 산업과 강제 노동
한편 카리브에서의 부의 착취는 1490년대부터 코미엔다에서 스페인 정착민들이 붙잡은 원주민들에게 금을 캐도록 강제한 스페인 식민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나 카리브 경제의 장기적 원동력은 금이 아니라 사탕수수의 재배로 이어졌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카리브 섬들이 당시 고가치 수출 상품이었던 사탕수수 재배에 유리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카리브 농업의 수출 역사는 유럽 식민지 지배와 직접적으로 연관됩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대서양 섬들에서 강제 노동을 이용한 농장 설탕 재배 시설을 세웠고, 설탕은 18세기 전까지 유럽에서 사치품으로 생산 증가와 가격 인하에 따라 18세기에 널리
대중화되었으며, 19세기에 들어서는 유럽에서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필수 식품 원료로서 설탕에 대한 이러한 취향과 수요의 진화는 주요 경제적 사회적 변화를 촉발하였고, 풍부한 햇살, 많은 강우량, 장기간 서리가 없는 카리브 섬들은 사탕수수 농업과 설탕 공장에 매우 적합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 식민지화의 초기 시절에는 대학살로 인해 원주민 인구가 가파르게 감소됨에 따라 노동력 부족이라는 문제가 대두되었고, 스페인은 설탕 재배를 위한 대규모의 노동력을 찾아 나섰으며, 이에 아프리카 노예들의 대규모 강제 이주를 착수했습니다.
3. 카리브의 설탕
스페인의 카리브 설탕 농장의 성공은 다른 유럽 강대국들에 본보기가 되었으며, 브라질의 포르투갈 식민지 또한 대규모 설탕 농장을 발전시켰습니다. 17세기에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가 카리브 섬들을 장악하면서 농장 농업을 발전시켰고, 18세기 중반에 이르러 설탕은 카리브 섬들의 단순한 식민지 이상으로 중요한 영국의 가장 큰 수입품이 되었습니다.
또한 카리브의 섬들은 스페인 국왕이 해외 소유물들을 부과하고자 추진했던 무역 독점에 대한 스페인의 제재를 회피한 유럽 상업의 근거지가 되었습니다. 1833년 영국에서의 노예 해방 선언에 따라 자유를 얻은 많은 카리브의 아프리카인들은 과거의 주인들을 떠났습니다. 이는 영국의 카리브 사탕수수 농장주들에게 경제적 혼란을 초래했는데, 무덥고 습한 농장에서의 고된 노동력을 고용할 때 농장주들은 튼튼하면서도 저임금 남성 노동력을 원했습니다.
해방 이후의 변화와 경제 구조의 고착
그러다 영국인들은 값싼 노동력을 찾아냈는데, 이들이 찾아낸 노동력은 초기에 중국과 인도에서 구해오면서 영국은 강제 노동의 새로운 법 체계를 만들어냈고, 이러한 법 체계는
많은 면에서 노예제와 유사했습니다. 이들은 노예화된 노동력이 아닌 계약 노동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 체제는 가혹했습니다. 인도 아대륙에서 온 이민자들은 대영제국의
사탕수수 농장들에서 일하는 계약 노동에 따라 과거 노예로 사들였던 아프리카인들을 대체하기 시작했습니다.
사탕수수 농장의 계약 노동자들을 실은 최초의 선박들은 1836년에 인도에서 출발했고, 차후 70년에 걸쳐 훨씬 더 많은 선박들이 고된 근무에 비해 값싼 노동력이었던 계약 노동자들을 카리브로 데려왔으며, 전 세계에 걸쳐 여러 국가에서 유럽 식민지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수백만 명에 이르는 계약 노동자들이 카리브에 도달했습니다.
설탕의 가격은 저렴해졌지만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농업 수출은 도시 수가 적고 산업 기반이 존재하지 않던 카리브 섬들의 경제를 장악했는데, 농업 노동자들에게는 도시 비농업 고용의 대안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생산자들은 노동 비용을 싸게 유지하고 자신들의 수익을 높이려 했기 때문에 농업 노동자들의 임금은 극도로 낮았으며, 인상될 가능성이 전혀 없었습니다. 카리 농업의 수익은 산업 발전이나 농업 노동자들의 근로 조건 변화로 전환되지 않았고, 산업화 국가들은 산업 노동 계층에 대한 값싼 식량 공급원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카리브 섬들은 계속해서 사탕수수
생산지로 남게 되었습니다. 사탕수수는 더 이상 상류층만을 위한 고가치 상품이 아니었습니다. 카리브 설탕은 산업 노동계층이 식사의 주요 원료로 고려할 만큼 저렴하였고, 따라서 카리브 생산국들이 식민지 시대 동안 구축된 선진국과의 경쟁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은 매우 어려웠으며, 카리브 국가들은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마무리하며
오늘은 카리브 해 역사 세 번째 시간으로 아프리카 노예 반란과 설탕, 식민지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럼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드리며 평안한 하루 보내세요.
Created by 지식트리 @G_seektree
CC BY 라이선스 / 교정 by SENTENCIFY / 편집자 최선화
지식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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