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브 해 역사 2 : 위그노 해적과 노예들
📌 먼치 POINT
카리브 해 지역의 역사와 유럽 강대국들의 식민지 확장, 해적 활동,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끌려온 노예들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습니다. 16세기부터 17세기 동안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이 카리브 해 섬들을 차지하며 갈등을 벌였고, 이로 인해 해적 활동과 밀수업이 성행했습니다. 또한, 농업의 발전에 따라 아프리카 노예들이 대량으로 이주되어 큰 고통을 겪었으며, 19세기까지 그들의 자유를 위한 싸움이 이어졌습니다.
들어가기 전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항해 직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중앙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황금을 벌어들이기 위한 식민지 활동을 펼쳐 나갔고, 곧이어 네덜란드와 영국, 프랑스 같은 다른 유럽 강대국들도 카리브 해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수백만 명의 노예들을 데려오게 됩니다.
이번 글은 카리브 해 역사 두 번째 시간으로 지난 카리브 해 원주민 이야기에 이어 유럽 강대국들의 식민지와 해적에 관해 다루어 보겠습니다.
1. 유럽 강대국들의 식민지화
버뮤다의 영국 식민지화는 1612년에 시작되었으며, 영국의 서인도 식민지화는 1623년 세인트 키츠, 1627년 바베이도스로 이어졌습니다. 세인트 키츠는 이후 레비스, 안티구아, 몬세라트, 앵귈라, 토르톨라 등의 식민지화 전초 기지로 사용되었습니다. 프랑스 역시 세인트 키츠에서 식민지를 시작했으며, 1625년 이 섬을 영국과 나눠 가졌습니다.
프랑스는 과들루프, 마르티니크, 생마르탱, 세인트바츠, 세인트 크로이 섬들을 식민지화하려 했으나, 1713년 이 지역은 영국에게 완전히 넘어갔습니다. 1655년에는 영국의 제독 윌리엄 펜이 자메이카를 점령하고, 이후 300년 이상 자메이카는 영국의 지배를 받습니다.
1640년부터 1680년 사이, 카리브 해 지역에는 해적들의 활동이 광범위하게 퍼졌습니다.
유럽 열강의 해상 패권 경쟁과 카리브의 해적 시대
1625년 무렵, 프랑스 해적들은 히스파니올라 섬 북쪽 토투가 섬에 정착지를 세웠습니다. 스페인의 여러 차례 공격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끝내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1659년, 루이 14세의 위임에 따라 정착지는 공식화되었고, 1670년에는 본토의 카프 프랑소와(현 카프아이시앵) 도시가 세워졌습니다. 1697년 리스빅 조약으로 스페인은 히스파니올라 서쪽 3분의 1을 프랑스에 공식 양도합니다.
17세기, 네덜란드는 사바, 생마르탱, 신트외스타티위스, 퀴라소, 푸에르토리코 등 여러 섬을 점령하며 네덜란드령 서인도 제도를 형성했습니다. 한편 덴마크-노르웨이는 1672년부터 현재 미국령 버진 제도를 통치하다가, 1917년 미국에 매각하게 됩니다.
2. 위그노 해적선
16세기 초 유럽의 권력 균형과 왕조 계승 문제는 유럽 대륙뿐 아니라 신대륙에서도 전쟁과 외교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프랑스와 스페인은 지속적인 경쟁 관계에 있었으며, 1521년 프랑스가 신성 로마 제국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카리브 해에서도 갈등이 본격화되었습니다.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는 스페인의 신대륙 독점에 반발해, 위그노 해적선(코르세어)들을 동원해 멕시코의 보물을 실은 스페인 선박들을 공격했습니다. 1523년에는 세인트 빈센트연안에서 코르세어들이 황금, 은, 진주, 설탕을 가득 실은 두 척의 스페인 선박을 나포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위그노 해적의 약탈
1528년에는 산토도밍고 해안에서 프랑스 해적선이 푸에르토리코 서부의 산 게르만 마을을 약탈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530년대 중반부터는 정기적으로 스페인 선박을 습격하고, 카리브 해 항구와 해안 마을들을 노략질했습니다. 특히 산토도밍고, 하바나, 산티아고, 산 게르만 같은 도시는 반복적으로 공격을 받았으며, 몸값을 요구하거나 마을을 파괴하지 않은 대가로 금품을 갈취하기도 했습니다.
3. 카리브 해 패권 경쟁
1536년 프랑스와 스페인의 전쟁이 재개되면서 프랑스 해적들의 활동은 더욱 거세졌고, 이후 약 10년 동안 60회 이상의 공격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은 수십 척의 스페인 선박을 나포하고, 정착지를 습격했습니다.
한편 영국도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하면서 스페인과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사략선을 동원한 공격을 지원했습니다. 특히 1588년 스페인 무적 함대가 영국 해군에 의해 전멸한 사건은 카리브 해의 세력 판도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이후 영국과 네덜란드는 더욱 공격적인 식민지 개척과 해적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네덜란드는 1590년대 중반부터 해적 활동을 확대했고, 영국은 존 호킨스, 프랜시스 드레이크와 같은 해적 겸 밀수업자들을 앞세워 스페인 식민지와 무역로를 공격했습니다. 이들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확보해 카리브 식민지에 불법적으로 들여오는 등 노예 무역까지 주도했습니다.
네덜란드의 밀수 원정
스페인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카리브 영토들에 대한 영국의 침입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 기간에 급증했는데, 이러한 침입은 존 호킨스, 존 옥센함, 프랜시스 드레이크 같은 해적 밀수업자들을 앞세운 조직적인 대규모 밀수 원정으로 가장했습니다. 이들의 주요 목표는 열대 생산물에 대한 대가로 스페인의 칼리브 영토들의 아프리카 노예들을 밀수입하는 것이었습니다.
1562년, 존 호킨스의 부하들이 시에라리온 연안에서 포르투갈 선박을 습격하고 배에 있던 300명의 노예들을 사로잡은 후 설탕, 가죽, 귀중한 목재에 대한 대가로 노예들을 산토도밍고에 밀수한 일이었는데, 호킨스와 그의 동시대 해적들은 배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노예의 수를 극대화하는 사악한 기술을 습득했습니다. 이와 다른 노예 무역상들은 아프리카 노예들이 옆으로 누워 서로에게 밥을 떠먹이도록 강제하는 방법으로 노예들을 가득 실었습니다.
예수스 오브 리백과 엘리자베스의 사략선들
이를 대표하는 사례는 호킨스의 노예 무역선인 예수스 오브 리백으로, 이 배는 엘리자베스 1세와 공동으로 소유한 것이었으며, 400명의 아프리카 노예들로 빽빽하게 채워졌습니다.카리브에서 일어난 영국과 스페인 전투의 대부분은 영국의 정규 부대가 아니라 엘리자베스 여왕이 스페인에 대한 공격 행위를 허가한 사략선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은 과거해적이었지만 이제는 사략선이라는 지위를 얻게 되었고, 이 시기 동안 705건 이상의 영국 해적 원정이 스페인 영토와 선박을 겨냥했습니다.
노예 무역과 아프리카인의 비극
카리브에서 농업이 발전함에 따라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해지면서 유럽인들은 노예로 만든 아프리카인들을 아메리카 대륙에 강제 이주시켜 노동력을 창출했습니다.
유럽인들의 대서양 노예 부역은 노예로 만든 아프리카인들을 아메리카에 있는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식민지들로 데려갔고, 아프리카 노예들은 16세기 초부터 19세기 말까지 주로 1701년에서 1810년 사이에 카리브로 끌려왔습니다. 이 시기 동안 카리브로 끌려온 노예들의 수는 영국령 식민지 약 160만 명, 네덜란드 식민지 약 50만 명, 프랑스령 식민지 약 160만 명에 달했습니다.
노예 해방과 그 이후
세월이 흘러 아메리카와 유럽의 노예 폐지론자들은 19세기 전반에 걸쳐 노예 무역에 대한 강경한 반대 운동을 펼쳤고, 식민지들에 대한 노예 수입은 불법으로 금지되었는데, 카리브에 있는 많은 노예들이 합법적으로 자유의 몸이 되기까지는 19세기가 한참 흐른 뒤였습니다. 영국령 서인도 제도 노예들의 자유는 1834년이 되어서야 이루어졌으며, 프랑스 식민지에서는 1948년에 노예제를 폐지했습니다.
마무리하며
오늘은 카리브 해 역사 두 번째 시간으로 카리브에 지역의 위그노 해적들과 식민지의 아프리카 노예들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럼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드리며 평안한 하루 보내세요.
Created by 지식트리 @G_seektree
CC BY 라이선스 / 교정 by SENTENCIFY / 편집자 최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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